I specialise in the history of China's Ming and Qing dynasties, with interests in Sino-Chinese relations and history education. I have focused my research on the rise and fall of the Grand Canal, particularly the rise and decline of China's Huizhou merchants as the leading merchant group in the Ming and Qing dynasties. I am currently interested in Beijing capital system(Yuan-Ming-Qing) and maritime history.
This article mainly deals with 15th century’s sino-korean relations based on recent research as a... more This article mainly deals with 15th century’s sino-korean relations based on recent research as a founding stone for comprehensive reexamination of sino-korean relationship from 15th century to 19th century. In the beginning of 15th century, going through the chaotic and turbulent period of the latter of 14th century, so called ‘Ming Order’ which had functioned as a basic framework for Ming-Choson relationship was established. The sino-korean relationship was very closely linked with China(Yuan and Ming)’s external policy and international change of relationships, so the extent of this relation’s change around 1400 was an unprecedented level. Therefore we have no choice but to pay attention to international relationships in which China played a central role first in order to fully understand Korea-China relations during 15th century. For this purpose, this article at first described the wholistic big picture of East Asian world. Second, I try to embody the detail of sino-korean rela...
본 논문은 “중국 전근대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기본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명대 성곽 축조를 둘러싼 국가권력과 도시민의 이해관계를 검토하면서 강남 사회의 도시 유형을 ... more 본 논문은 “중국 전근대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기본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명대 성곽 축조를 둘러싼 국가권력과 도시민의 이해관계를 검토하면서 강남 사회의 도시 유형을 양주, 소주, 남경, 시진의 네 가지로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유형화를 통해, 도시란 곧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안보 및 치안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이자 동시에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주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중국에서 도시는 안보와 경제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해주는 공간으로 기대되었다고 여겨진다. 성곽 축조 역시 도시민들에게 이러한 관점에서 수용되고 논의되었다. 양주는 대운하와 양자강이라는 장거리 유통망의 허브에 위치한 도시로, 외지에서 들어온 상인들이 도시 발전의 원동력을 장악했다. 그 결과 양주는 체류민 정체성이 강하게 부각되는 도시로 발전했으며, 축성 논의와 新城의 증설에 체류민들의 의지와 재정적 기여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면 소주는 송대 이래 항주와 함께 강남의 대표적인 경제·문화·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했고, 도시의 주도 세력은 상인이 아니라 신사였다. 이른바 정착민 정체성이 강한 도시로, 왜구의 위협 속에서 축성론이 제기되었으나 성사되지 못한 배경으로 체류민을 압도하는 소주 정착민들의 영향력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남경이 가진 도시의 생명력은 명조의 수도라는 정치적 맥락에서 주어졌다. 하지만 1421년 북경으로의 천도 이후 남경은 명목상의 수도로 전락했고, 점차 남방지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통제의 중심지로 변모해갔다. 이후 강남 지역 전체에 대한 통합의 구심력은 소주에 물려주었으나,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위상은 강하게 남아있어, 왜구의 침입 때에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축성의 논의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시진은 정치적, 행정적인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경제 도시였다. 시진은 대부분 성곽이 없었으므로 왜구의 침입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행정 중심지로 포섭된 일부 시진에서는 여러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성곽이 건설되었고, 일부 시진은 왜구의 침입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도 했다. 시진 사회에는 다분히 ‘자치적’인 요소가 많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시진 사회의 주도권이 보수적인 紳士에게 장악되어 갔으며, 국가 권력 역시 시진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확대해 갔다.
This article mainly deals with 15th century’s sino-korean relations based on recent research as a... more This article mainly deals with 15th century’s sino-korean relations based on recent research as a founding stone for comprehensive reexamination of sino-korean relationship from 15th century to 19th century. In the beginning of 15th century, going through the chaotic and turbulent period of the latter of 14th century, so called ‘Ming Order’ which had functioned as a basic framework for Ming-Choson relationship was established. The sino-korean relationship was very closely linked with China(Yuan and Ming)’s external policy and international change of relationships, so the extent of this relation’s change around 1400 was an unprecedented level. Therefore we have no choice but to pay attention to international relationships in which China played a central role first in order to fully understand Korea-China relations during 15th century. For this purpose, this article at first described the wholistic big picture of East Asian world. Second, I try to embody the detail of sino-korean rela...
본 논문은 “중국 전근대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기본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명대 성곽 축조를 둘러싼 국가권력과 도시민의 이해관계를 검토하면서 강남 사회의 도시 유형을 ... more 본 논문은 “중국 전근대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기본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명대 성곽 축조를 둘러싼 국가권력과 도시민의 이해관계를 검토하면서 강남 사회의 도시 유형을 양주, 소주, 남경, 시진의 네 가지로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유형화를 통해, 도시란 곧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안보 및 치안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이자 동시에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주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중국에서 도시는 안보와 경제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해주는 공간으로 기대되었다고 여겨진다. 성곽 축조 역시 도시민들에게 이러한 관점에서 수용되고 논의되었다. 양주는 대운하와 양자강이라는 장거리 유통망의 허브에 위치한 도시로, 외지에서 들어온 상인들이 도시 발전의 원동력을 장악했다. 그 결과 양주는 체류민 정체성이 강하게 부각되는 도시로 발전했으며, 축성 논의와 新城의 증설에 체류민들의 의지와 재정적 기여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면 소주는 송대 이래 항주와 함께 강남의 대표적인 경제·문화·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했고, 도시의 주도 세력은 상인이 아니라 신사였다. 이른바 정착민 정체성이 강한 도시로, 왜구의 위협 속에서 축성론이 제기되었으나 성사되지 못한 배경으로 체류민을 압도하는 소주 정착민들의 영향력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남경이 가진 도시의 생명력은 명조의 수도라는 정치적 맥락에서 주어졌다. 하지만 1421년 북경으로의 천도 이후 남경은 명목상의 수도로 전락했고, 점차 남방지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통제의 중심지로 변모해갔다. 이후 강남 지역 전체에 대한 통합의 구심력은 소주에 물려주었으나,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위상은 강하게 남아있어, 왜구의 침입 때에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축성의 논의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시진은 정치적, 행정적인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경제 도시였다. 시진은 대부분 성곽이 없었으므로 왜구의 침입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행정 중심지로 포섭된 일부 시진에서는 여러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성곽이 건설되었고, 일부 시진은 왜구의 침입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도 했다. 시진 사회에는 다분히 ‘자치적’인 요소가 많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시진 사회의 주도권이 보수적인 紳士에게 장악되어 갔으며, 국가 권력 역시 시진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확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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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s by young-hun cho
明代的两京制下的南京的机能和历史的意义,侧重关注正德帝在北京和南京之间进
行的南巡。
正德帝的南巡是明代两京制实行70余年后,唯一一次明代皇帝在两京间的巡幸。
与国家安保相关,重视传统西北地区大部分臣僚们和固执考虑新的形成威胁的东南
地区的皇帝之间出现了巨大的冲突。对上行和下行的路程中,皇帝的打猎、钓鱼,
以及爱妾的同行,搜罗女性等等失德和过分自由放荡的游乐行为,以往的评价中通
常会用“荒唐天子”来形容。
但是,在南京停留的8个月期间,正德帝的3次举动却和以往对他评价的形象相去
甚远。第一,在朱宸濠叛军的目标据点南京长时间的逗留,都是使得不安的南方地
区趋于安定的考虑。第二,在到达南京以前,正德帝下令“禁民间畜豬”。这比起说
是从占术师们的姓名避讳论而言,更是为了顾及当时禁食猪肉的穆斯林们的一种措
施。通过对穆斯林的怀柔政策,一方面是希望借此政策安抚穆斯林,是他们不要成
为出现的在江南地区不安因素,防患于未然。第三,在南京期间,正德帝会见了第
一次进入中国的葡萄牙使节团并允诺其可以进入北京城。这也同样解释了对异国和
异民族的宽厚态度,以及避免了不必要的相互骚扰的可能性。
这样,对于正德帝的南巡,虽然从名义上说是夸张了亲征朱宸濠的叛乱的史实,
但是长期停留在南京的最终目的还是要消除对叛乱余波带来的不安影响,并强化留
都南京的安保实施。正德帝的南巡,是在北京立都之后,现存唯一可以看到皇帝政
权对江南实行管制的唯一事例,同时这一事件也将南京刻上了南方地区安保中心的
烙印。
明代的两京制下的南京的机能和历史的意义,侧重关注正德帝在北京和南京之间进
行的南巡。
正德帝的南巡是明代两京制实行70余年后,唯一一次明代皇帝在两京间的巡幸。
与国家安保相关,重视传统西北地区大部分臣僚们和固执考虑新的形成威胁的东南
地区的皇帝之间出现了巨大的冲突。对上行和下行的路程中,皇帝的打猎、钓鱼,
以及爱妾的同行,搜罗女性等等失德和过分自由放荡的游乐行为,以往的评价中通
常会用“荒唐天子”来形容。
但是,在南京停留的8个月期间,正德帝的3次举动却和以往对他评价的形象相去
甚远。第一,在朱宸濠叛军的目标据点南京长时间的逗留,都是使得不安的南方地
区趋于安定的考虑。第二,在到达南京以前,正德帝下令“禁民间畜豬”。这比起说
是从占术师们的姓名避讳论而言,更是为了顾及当时禁食猪肉的穆斯林们的一种措
施。通过对穆斯林的怀柔政策,一方面是希望借此政策安抚穆斯林,是他们不要成
为出现的在江南地区不安因素,防患于未然。第三,在南京期间,正德帝会见了第
一次进入中国的葡萄牙使节团并允诺其可以进入北京城。这也同样解释了对异国和
异民族的宽厚态度,以及避免了不必要的相互骚扰的可能性。
这样,对于正德帝的南巡,虽然从名义上说是夸张了亲征朱宸濠的叛乱的史实,
但是长期停留在南京的最终目的还是要消除对叛乱余波带来的不安影响,并强化留
都南京的安保实施。正德帝的南巡,是在北京立都之后,现存唯一可以看到皇帝政
权对江南实行管制的唯一事例,同时这一事件也将南京刻上了南方地区安保中心的
烙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