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연도
해 1781년 1782년 1783년 - 1784년 - 1785년 1786년 1787년 |
연대 1760년대 1770년대 - 1780년대 - 1790년대 1800년대 |
세기 16세기 17세기 - 18세기 - 19세기 20세기 |
1784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연호
편집기년
편집사건
편집- 1월 13일(음력 12월 21일) - 조선의 대청(對淸) 사신 동지 겸 사은 정사 황인점(黃仁點) 일행이 북경에 이르러 서관(西館)에 거처를 정하고, 그날로 예부(禮部)에 가서 표문(表文)·자문(咨文)을 바치니, 한 시랑(漢侍郞) 장존여(莊存與)가 이를 받았다.[1] 이 일행에는 이승훈도 포함되어 있었다.[2]
- 1월 22일(음력 1월 1일) - 청나라 북경 태화전(太和殿)에서 동반·서반 및 조선·유구국의 사신들이 고종 건륭제에게 행례(行禮)하였다.[3]
- 음력 1월 - 이승훈이 북경의 주교좌(主敎座)성당인 남천주당에서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 4월 13일(음력 3월 24일) - 이승훈이 성서와 성상·묵주 등을 가지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 8월 27일 - 첫 풍선기구가 에든버러에서 제임스 타일러에 의해 만들어짐
- 이승훈, 이벽 등이 수표교 부근의 이벽의 집에서 교리공부를 하고 전교활동을 하였고, 가을에는 이승훈이 이벽의 집에서 김범우에게 세례를 주었다.
- 겨울 -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이벽, 이가환, 이승훈과 권일신 등은, 신자가 늘어나 이벽의 집으로는 비좁아지자, 한성부 명례방에 있는 좀더 넓은 김범우의 집에서 이어서, 정기적으로 모여 미사를 집전하고 교리 공부 등을 시작하였다. 이로서 명례방공동체가 생겨났다.[4]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유명한 등차수열의 합 공식, (n(n+1))/2를 7세 때 생각해 냄.
- 조선의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에 관한 역사서인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함
-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이승훈이 중국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5]
탄생
편집사망
편집- 7월 8일 - 스웨덴의 화학자, 박물학자 토르베른 올로프 베리만.
- 7월 31일 -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작가 드니 디드로
각주
편집- ↑ 정조실록 1805 17권, 정조 8년 2월 17일 계유 4번째기사
- ↑ 정조실록 1805 33권, 정조 15년 11월 3일 갑술 2번째기사 " 그 아버지의 사행(使行)에 따라가 수백 권의 사서(邪書)를 널리 가져와 젊고 가르칠 만한 사람들을 그르친 자가 있으니, 바로 평택 현감 이승훈이 그 사람입니다. "
- ↑ 정조실록 1805 17권, 정조 8년 2월 17일 계유 4번째기사
- ↑ “명동성당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1) 명례방 공동체와 명동성당”. 평화신문. 2011년 9월 25일.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함으로써 한국교회가 시작된 1784년으로 돌아가 보자.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은 이벽(요한 세례자)은 수표교(현 서울 중구 수표동 소재) 부근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교리공부를 하고 전교활동을 하다가 신자들이 늘어나자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토마스) 집을 공동체 삼아 집회를 이어나갔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일중당편집부 <대한국사 4권, 조선시대> 청화 1983년 p103
참고 문헌
편집- 춘추관 관원들 (1805). 《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