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
잔글 봇: 분류 앞 공백 정리 |
||
(사용자 17명의 중간 판 43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
|||
{{다른 뜻|신시 (동음이의)}} |
|||
{{다른 뜻}} |
|||
⚫ | |||
{{한국사}} |
|||
⚫ | |||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신시를 수도로 하는 ‘[[환웅]]’의 ‘신시배달국 ’으로 [[고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의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
== 개요 == |
== 개요 == |
||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시는 [[환웅]]이 하늘에서 무리 3천과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이끌고 내려와 세상을 다스린 곳이라고 한다. 그 위치는 [[태백산]] |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시는 [[환웅]]이 하늘에서 [[천부삼인]], 무리 3천과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이끌고 내려와 세상을 다스린 곳이라고 한다.<ref>"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遣徃理之。 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 神壇樹下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삼국유사|三國遺事]]》 卷 第一, 紀異 第一 古朝鮮王儉朝鮮條。</ref> 그 위치는 [[묘향산|태백산]]{{efn|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태백산'''은 [[묘향산]]이다.<ref>太伯山。<small>《古記》:“昔有天神桓因,命庶子雄持天符三印,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神檀樹下,謂之神市,主人間三百六十餘事。時有一熊常祝于神,願作人身。神遺靈藥使食,熊食之,化爲女。神因假化爲昏而生子,是爲檀君。立國號曰朝鮮。</small>”....... 瀀渤水。<small>澤名。在太伯山南。</small>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寧邊大都護府, 古跡條。</ref>}} [[신단수]](神壇樹)였다. 환웅은 신시에서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면서 세상을 다스렸다고 한다.<ref>"將風伯·雨師·雲師, 而主糓·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 《[[삼국유사|三國遺事]]》 卷 第一, 紀異 第一 古朝鮮王儉朝鮮條。</ref> |
||
한편 신시는 일부 기록에서 인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허목]]의 《[[동사 (허목)|동사]](東事)》나 《[[규원사화]]》에는 [[환웅]]을 ‘신시씨(神市氏)’라 지칭하고 있고 《[[규원사화]]》에는 [[단군조선]]을 '단국(檀國, 박달나라 또는 배달나라)'<ref><지명> 상고 시대 이름. 한자를 빌려 ‘倍達’로 적기도 한다. [비슷한 말] 단국3(檀國)ㆍ배달나라.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배달민족·배달겨레·배달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ref>으로 설명하였다. |
한편 신시는 일부 기록에서 인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허목]]의 《[[동사 (허목)|동사]](東事)》나 《[[규원사화]]》에는 [[환웅]]을 ‘신시씨(神市氏)’라 지칭하고 있고 《[[규원사화]]》에는 [[단군조선]]을 '단국(檀國, 박달나라 또는 배달나라)'<ref><지명> 상고 시대 이름. 한자를 빌려 ‘倍達’로 적기도 한다. [비슷한 말] 단국3(檀國)ㆍ배달나라.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배달민족·배달겨레·배달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ref>으로 설명하였다. |
||
또한 [[1811년]]([[조선 순조|순조]] 11)에 [[정약용]](丁若鏞)은 편찬한 [[조선]] 강역에 관한 역사지리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산정이 늘 하얀 눈으로 덮여 있어 백두산이라 불렀고, 시조 [[단군왕검]]이 이곳에서 탄생하여 단국(檀國)이라는 나라를 기원전 2333년에 창건<ref>{{뉴스 인용|url=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10/h2008100102404284330.htm|제목=박창범 "개천절은 음력으로, 개국일은 요 원년으로"|이름=김희원 기자|작성일자=2008-10-01|출판사=한국일보|언어=한국어|확인일자=2013-06-21}}</ref>하였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민족]] 기원에 [[환웅]] 역시 이곳에서 탄생, 신시(神市)라는 나라를 개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ref>白頭山(백두산)의「眞面(진면)」속속 책으로, 1991.03.16, 경향신문 22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참조</ref> |
|||
== 의미 == |
== 의미 == |
||
신시는 신정시대(神政時代)에 도읍 주변에 있던 별읍(別邑)으로 [[삼한]]의 [[소도]](蘇塗)와 같은 성격의 신읍(神邑) 또는 성역으로 해석된다. 또는 지명이 아닌 [[환웅]]을 가리키는 인명으로서 [[삼한]]의 신지(臣智)와 같은 존칭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ref>이병도, 《한국사 -고대편-》,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59년</ref> |
신시는 신정시대(神政時代)에 도읍 주변에 있던 별읍(別邑)으로 [[삼한]]의 [[소도]](蘇塗)와 같은 성격의 신읍(神邑) 또는 성역으로 해석된다. 또는 지명이 아닌 [[환웅]]을 가리키는 인명으로서 [[삼한]]의 신지(臣智)와 같은 존칭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ref>이병도, 《한국사 -고대편-》,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59년</ref> |
||
'신시'를 글자 대로 풀이하자면 '신의 시장(저잣거리)'이다. 신시를 신의 도시로 해석하는 것이 종래의 설이나, 시(市)가 도시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근대 이후므로 신시를 신불(巿:슬갑 불; 巾-총4획)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불은 고대말로 현재의 땅이라는 뜻으로 '벌'이라는 현대어가 남아 '벌판'등으로 쓰인다<ref>신종원, 단군신화에 보이는 樹木信仰, 韓國史學史學報 8, 5-22 (2003) |
'신시'를 글자 대로 풀이하자면 '신의 시장(저잣거리)'이다. 신시를 신의 도시로 해석하는 것이 종래의 설이나, 시(市)가 도시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근대 이후므로 신시를 신불(巿:슬갑 불; 巾-총4획)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불은 고대말로 현재의 땅이라는 뜻으로 '벌'이라는 현대어가 남아 '벌판'등으로 쓰인다<ref>신종원, 단군신화에 보이는 樹木信仰, 韓國史學史學報 8, 5-22 (2003)</ref>. 후대의 서라벌, 신라, 서울과 같이 필요에 의해 자연적으로 생성한 형태로 보기도 한다. |
||
⚫ | |||
이러한 가운데 [[중국]]의 만주지역 [[홍산문화]]가 발견되면서 새로운 양상을 갖는다. 즉,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예맥족]]이 근간을 이루는 [[고조선]] 이전의 [[환웅]]의 신시배달국의 유적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해석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
|||
{{Notelist}} |
|||
[[1983년]]에 [[랴오닝성]] [[링위안 시]]에서 [[젠핑 현]]에 걸친 넓은 범위에서 발견된 《뉘우허량 유적》에서는 기존의 [[홍산문화]]와 다른 거대한 제사 시설이 발견되었다. |
|||
유적은 5㎢의 넓은 범위에 돌을 쌓아 만들어진 분묘나 제단이 정연하게 분포하고 있다. 또한 돌 마루와 채색한 벽이 있던 신전이 발견되었고, 눈을 비취로 만든 여성두상 도기가 발견되어《여신묘》라고 불리게 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지하 1m에서 제사를 지냈던 장소나 제단, 벽화, 돌무덤(석총) 등이 발견되었다. |
|||
여신묘안에는 사람 세 배 크기의 도제의 상이 줄지어 있었다. 이 상은 신상으로 추측되며, 현재 [[중국]] 문화에서는 유례없는 것이었다. 뉘우허량에서 발견된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존재나 또 여러 가지 토지와 교역의 증거로 인해 이 시기에 선사시대의 수장국인 왕국이 있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
|||
여신묘에서는 [[칠무늬토기|채도]]도 발견되었다. 부근에서 60개 이상의 고분도 발굴되었고, 이것들은 돌을 짜서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약돌을 씌워 무덤을 만들었다. 그 내부에서 구슬 등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근처의 두 곳의 언덕 위에는 돌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가까운 곳에서는 석회암을 쌓아 올려 만든 둥근 무덤이나 사각형의 무덤도 있었다. 이러한 고분 중에서는 곰이나 용, 거북이의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유물로 홍산 문화에서는 이미 제물을 바쳤다는 지적이 생겨나고 있다. |
|||
[[양사오 문화]] 초기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에서 알 수 있듯이 홍산 문화의 유적에서도 초기의 풍수의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뉘우허량 유적 등, 홍산 문화의 제사 유적에 볼 수 있는 원형이나 방형(사각형)은 천단의 우주관이 벌써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시사하고 있다. |
|||
발견 당시, 이전에는 역사기록에 없는 그 누구도 몰랐던 여신묘에서 다량의 옥기가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중국]]의 옥기 전문가들은 이곳에서 옥을 자를 때 쓴 도구를 발견했는데, 당시 그 시대와 동일한 조건에서 실험을 해보니 실제 발굴되는 것과 비슷한 1.5cm정도 두께의 옥에 모래나 옥가루를 뿌려가면서 나무 막대기를 돌려서 구멍을 파는데 순수한 작업시간만 31시간이 걸렸다. |
|||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되는 정교한 옥기 하나를 완성하려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중국]] 학자들은 홍산문화 시대에 최소한 7등급으로 신분이 분화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홍산문화 시대에 옥기를 만드는 장인집단이 따로 존재했었고, 신분이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해 묘장 마다 크기가 다르고, 매장 방식이 다른 것도 신분 분화의 증거라는 이유다. |
|||
여신묘와 한 변이 20~30미터짜리 3층 피라미드식 적석총, 가장 큰 60미터짜리 7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쌓으려면 엄청나게 많은 인원을 필요하므로 중국학계에서는 홍산문화 후기 단계를 초기 국가단계, 초기 문명단계라고 보고 있다.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안내문에는 ‘약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홍산문화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
|||
기존의 역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단계에 진입한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문자와 청동기였는데 홍산문화 시대에 문자와 청동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기 국가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여러 형태로 있는 다량의 옥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 뉘우허량 유적의 발견이후 청동기가 없어도 국가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 ‘옥기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이 웅녀상과 더불어 옥기는 [[환웅|환웅시대]]의 신시배달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 단서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ref name="옥기시대">{{뉴스 인용|url=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02816.html|제목=7층짜리 거대 피라미드는 ‘판도라 상자’|이름=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정리 박종찬 기자|작성일자=2012-09-24|출판사=한겨레신문|언어=한국어|확인일자=2013-06-09}}</ref><ref name="우량하">{{뉴스 인용|url=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111116004379&subctg1=&subctg2=|제목=단군 할아버지의 고향은 어디일까|이름=홍종선 인하대 국문과 교수|작성일자=2011-11-17|출판사=세계일보|언어=한국어|확인일자=2013-07-23}}</ref> |
|||
그런데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의하면 [[조선족]]의 역사는 [[중국사]]에 포함되고 있다. 실제로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내세우는 것을 반영하는 예로서, [[조선족]] 자치구 [[길림성]]의 만천성국가삼림공원에는 웅녀상이 건립되어 있다. 즉, [[웅녀]]가 [[한민족]]의 시조모가 아닌 [[조선족]]의 시조모이며, [[조선족]]은 [[중국인]]에 속하므로 [[조선족]]의 [[웅녀]]는 [[중국인]]의 시조모이기도 하다는 논리이다. 곰곰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ref>{{뉴스 인용|url=http://photo.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0/02/2007100200239.html|제목='중국 웅녀'도 마늘?, 단군신화마저 동북공정|성=|이름=허영한 기자|작성일자=2007-10-02|출판사=조선일보|확인일자=2013-05-24}}</ref> |
|||
== 야사 속의 신시 == |
|||
《[[규원사화]]》의 〈태시기(太始紀)〉에는 신격에 가까운 존재인 환웅 또는 신시씨가 인간세상을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치세 기간은 궐천년(闕千年, 11000년) 또는 궐백년(10100년)이라 한다. 신시씨는 치우씨, 고시씨, 신지씨, 주인씨 등을 부렸다고 하며 《환단고기》와 일부분 중복되는 치세 기록이 존재한다. 전체적인 성격으로 본다면, 〈태시기〉는 창세를 다룬 〈조판기〉를 이어 처음 생겨난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여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을 세우기 직전 단계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
|||
《[[환단고기]]》에서는 신시를 [[환단고기#신시배달국|신시배달국]]이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신시배달국 또는 배달국은 고조선 이전의 고대 국가로 기원전 4000년 경에 [[환국]]의 뒤를 이어 성립되었으며 1565년간 존재하였고 그 군주가 바로 [[환웅]]이라고 한다. [[환웅]]은 모두 18대를 이어 신시배달국을 다스렸다고 하며, 그 상세한 역년도 기록되어 있다. |
|||
또한 역대 [[환웅]]들 가운데 일부의 치세도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14대 [[환웅]]인 자오지환웅의 기록이 상세하다. 일부 재야사학자 및 네티즌들은 《[[환단고기]]》의 내용을 신봉하여 신시배달국 또는 배달국이 만주 및 한반도, 화북 지방을 지배한 초강대국이며 그 군주인 자오지 [[환웅]]은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치우]]라고 주장하고<ref>임승국 주해,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1986년 등</ref> [[중국]] 사서에 ‘구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 [[사마천]]의 《[[사기 (역사서)|사기]](史記)》에는 “[[신농씨]]의 후계 [[치우]]가 구려족(동이)의 임금”이라고 쓰여있다. (구려국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九黎之君號曰蚩尤), 치우는 고대의 천자이다(蚩尤古天子), 《[[서경 (책)|서경]](書經)》을 인용하여 기록) <ref>여운건·오재성, 《과학으로 밝혀진 우리고대사》, 2004년</ref> |
|||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사학계에서는 이들이 근거로 삼는 야사들이 대부분 [[위서 (역사학)|위서]]이며 그 내용 또한 신빙성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기록을 참고하여 신화적인 나라형태로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즉, [[환웅]]이 만주 홍산 지역의 넓은 평원이 배달국에 적합한 것으로 결정을 내리고, 신시를 세웠고 신과 인간이 함께하는 도시로 신이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고, 인간이 노력하여 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도시를 이루어 신시 배달국에서 본격적인 선진 문물이 전수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ref name="신시">{{서적 인용|저자=김대선, 카르멘텔스|제목=동이족의 숨겨진 역사와 인류의 미래|꺾쇠표= 예|연도=2011|출판사=|수선재|ISBN=9788989150787}}</ref> |
|||
《[[부도지]]》에는 신적 존재인 환웅씨가 인간 세상을 다스렸다는 내용이 나타나며 ‘신시’는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후에 함께 모여 서로 돕고 화합하고 이치를 배우는 자리로서 세워졌다고 한다. 신시는 10년마다 열렸으며, 마음을 정화하고 하늘을 살피며, 희생물로 제를 지내고 모여 노래하는 곳이라고 한다. |
|||
김교헌의 《[[신단민사]]》에는 천신(神市氏)이 개천 갑자 상달(10월) 초사흗날(3일)에 ‘신시’의 시대를 열고 120년간 백성을 가르치고, 무진년 10월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지하]]는 신시를 여러 부족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장을 연 것이라고 한다.<ref>[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506/200506260270.html 김지하, 《문명의 시원을 찾아서》<4>‘장바닥에 비단이 깔릴 때’]</ref> |
|||
한편 [[1983년]], [[랴오닝성]] [[링위안 시]]에서 [[젠핑 현]]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된 [[훙산 문화]](뉘우허량 유적, 牛河梁遺跡, Niuheliang)를 계기로 학계에서도 점차적인 관심과 함께 [[훙산 문화]]와 신시배달국의 역학관계를 비롯하여 [[훙산 문화]]를 정점으로 하는 [[요하문명]]을 조명하여 추적{{·}}연구하고 있다. <ref name="옥기시대"/><ref name="우량하"/> |
|||
⚫ | |||
[[중국]]의 흥륭와문화([[홍산문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옥기다. 이 지역에서 해골(두개골) 모양의 옥기와 홍산인들이 옥기를 만든 기술의 옥결(옥 귀거리)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기원전 6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세계 최초로 인간이 가공한 옥기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유적에서 나왔다.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2007년에 전남 여수에서도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모양이 흥륭와문화 옥결과 똑같다. |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문암리유적에서 나온 옥 귀걸이(사적 426호)도 기원전 6,000년 이상으로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흥륭와에서 나온 옥결이 중국 내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연구한 사람이 있다. 홍콩 중문대학의 등총교수라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옥기 전문가의 논문에 의하면 “기원전 6000년께 요서지역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기원전 5000~4000년께 장강유역에 전파되고, 기원전 2500년께 중국 광동성 광주 근처 주강유역까지 퍼졌다. 옥결은 기원전 2000년께 더 남쪽인 베트남 북부까지 전파되고 기원전 1000년께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 남부까지 시간 차를 두고 확산되었다.”고 전해진다. |
|||
[[한반도]]에도 비슷한 시기에 옥결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흥륭와 옥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직선거리로 400km 떨어진 랴오닝성의 수암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옥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압록강이고 두만강쪽으로 동해를 타고 내려오면 문암리로 연결된다. 흥륭와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도 문암리 유적에서 똑같이 나온다. 기원전 6천년에 흥륭와문화 단계에서는 한반도 북부지역과 요서, 요동 지역이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다. |
|||
[[홍산문화]]의 가장 놀라운 유물은 흥륭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이다. [[중국]],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발굴하고 4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진짜 수술 흔적 같기는 한데, 기원전 6천년 흥륭와문화 시대에 치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유골을 가져가서 4년간 집중연구를 해 2008년 2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틀림없이 인공적인 치아수술 흔적이라는 것이다. 두개골이 그대로 나왔고, 치아에 뚫린 구멍의 직경이 모두 같고 도구를 이용한 연마흔적도 발견되었다. |
|||
현미경 사진을 찍어봤더니 나선형 연마흔적을 발견했고 이것은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구멍을 뚫은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충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수술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개골 수술은 유럽에서 기원전 5천 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2,500년 두개골 수술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이렇게 이른 시기에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륭와 유적지가 유일하다. |
|||
이보다 앞서 [[1924년]] 탐험가 F.A. 미첼 헤지스가 중앙 아메리카 루바툰에 있는 마야의 고대사원을 굴착하던 중 처음으로 발견되었는데 크리스탈 두개골은 마야문명 연구가인 마이클 미첼 헤지스와 딸 안나 헤지스에 의해 2대에 걸쳐 발견된 것으로 높이 12.7cm, 무게 5.2kg의 모형이다. 크리스탈 두개골은 실제 여성의 두개골과 흡사하다. 마이클과 안나는 크리스털 두개골을 영국국립박물관에 전시했으며, 이에 대해 한 학자는 누군가 인공적으로 만든 가짜라고 주장했다. |
|||
하지만 전문가에게 크리스털 두개골 분석을 의뢰한 결과 크리스탈 두개골이 1만 2000년 전에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제 크리스탈 두개골은 하나의 크리스탈 덩어리를 깎아서 만들어졌음이 확인 됐으며, 금속 도구를 사용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첨단 기술로도 세공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안나는 크리스털 두개골은 고대 마야 문명지에서 발견됐으므로 마야인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으로 요하문명의 주역인 홍산인들의 옥기로 만든 해골(두개골) 모양과 마야문명의 주역인 마야인들의 크리스탈으로 된 해골(두개골) 모양의 유사성으로 비교가 되고 있다. <ref>{{뉴스 인용|url=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01553.html|제목=‘제5의 문명’ 요하는 ‘중화’역사엔 없었다|성=|이름=박종찬 기자|작성일자=2012-09-17|출판사=한겨레신문|확인일자=2013-08-10}}</ref><ref>{{뉴스 인용|url=http://blog.donga.com/milhoon/archives/575|제목=중국이 절대 공개하지 않는 단군 신화의 증거 - 홍산옥기|성=|이름=이정훈 기자|작성일자=2013-01-23|출판사=동아일보|확인일자=2013-08-10}}</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11/2013081100691.html|제목=크리스탈 두개골, 1만 2000년전에 만들어져…"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미확인"|성=|이름=조선닷컴|작성일자=2013-08-11|출판사=조선일보|확인일자=2013-08-11}}</ref> |
|||
⚫ | |||
⚫ | |||
== 같이 보기 == |
== 같이 보기 == |
||
* |
* [[웅녀]] |
||
* [[예맥|예맥족]] |
* [[예맥|예맥족]] |
||
* [[홍산문화]] |
|||
* [[삼국유사]] |
* [[삼국유사]] |
||
* [[환단고기]] |
|||
⚫ | |||
⚫ | |||
== 참고자료 == |
== 참고자료 == |
||
83번째 줄: | 34번째 줄: | ||
* 이유립, 《환단고기》, 광오이해사, 1979 |
* 이유립, 《환단고기》, 광오이해사, 1979 |
||
* 김교헌, 《신단민사》 |
* 김교헌, 《신단민사》 |
||
{{한국 신화}} |
|||
[[분류:고조선]] |
[[분류:고조선 신화]] |
||
[[분류:단군]] |
[[분류:단군]] |
||
[[분류:단군조선]] |
[[분류:단군조선]] |
||
[[분류:한국 |
[[분류:한국 신화의 장소]] |
||
[[분류:신화의 |
[[분류:신화의 도시]] |
2024년 5월 9일 (목) 12:18 기준 최신판
한국의 역사 |
---|
신시(神市)는 환웅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고조선 이전의 신화적인 도읍지 또는 국가로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신화적인 면이 강하기에, 일반적으로 한민족의 신화나 전설상 나라의 하나로 보고 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신시를 수도로 하는 ‘환웅’의 ‘신시배달국 ’으로 고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의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개요
[편집]《삼국유사》에 따르면 신시는 환웅이 하늘에서 천부삼인, 무리 3천과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이끌고 내려와 세상을 다스린 곳이라고 한다.[1] 그 위치는 태백산[a] 신단수(神壇樹)였다. 환웅은 신시에서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면서 세상을 다스렸다고 한다.[3]
한편 신시는 일부 기록에서 인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허목의 《동사(東事)》나 《규원사화》에는 환웅을 ‘신시씨(神市氏)’라 지칭하고 있고 《규원사화》에는 단군조선을 '단국(檀國, 박달나라 또는 배달나라)'[4]으로 설명하였다.
의미
[편집]신시는 신정시대(神政時代)에 도읍 주변에 있던 별읍(別邑)으로 삼한의 소도(蘇塗)와 같은 성격의 신읍(神邑) 또는 성역으로 해석된다. 또는 지명이 아닌 환웅을 가리키는 인명으로서 삼한의 신지(臣智)와 같은 존칭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5]
'신시'를 글자 대로 풀이하자면 '신의 시장(저잣거리)'이다. 신시를 신의 도시로 해석하는 것이 종래의 설이나, 시(市)가 도시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근대 이후므로 신시를 신불(巿:슬갑 불; 巾-총4획)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불은 고대말로 현재의 땅이라는 뜻으로 '벌'이라는 현대어가 남아 '벌판'등으로 쓰인다[6]. 후대의 서라벌, 신라, 서울과 같이 필요에 의해 자연적으로 생성한 형태로 보기도 한다.
주해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遣徃理之。 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 神壇樹下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三國遺事》 卷 第一, 紀異 第一 古朝鮮王儉朝鮮條。
- ↑ 太伯山。《古記》:“昔有天神桓因,命庶子雄持天符三印,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神檀樹下,謂之神市,主人間三百六十餘事。時有一熊常祝于神,願作人身。神遺靈藥使食,熊食之,化爲女。神因假化爲昏而生子,是爲檀君。立國號曰朝鮮。”....... 瀀渤水。澤名。在太伯山南。 《新增東國輿地勝覽》 寧邊大都護府, 古跡條。
- ↑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糓·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 《三國遺事》 卷 第一, 紀異 第一 古朝鮮王儉朝鮮條。
- ↑ <지명> 상고 시대 이름. 한자를 빌려 ‘倍達’로 적기도 한다. [비슷한 말] 단국3(檀國)ㆍ배달나라.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배달민족·배달겨레·배달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 ↑ 이병도, 《한국사 -고대편-》,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59년
- ↑ 신종원, 단군신화에 보이는 樹木信仰, 韓國史學史學報 8, 5-22 (2003)
참고자료
[편집]- 일연, 《삼국유사》
- 북애자, 《규원사화》
- 허목, 《동사》
- 김은수 번역, 박금 복원, 박제상 저, 《부도지》, 한문화, 2002
- 이유립, 《환단고기》, 광오이해사, 1979
- 김교헌, 《신단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