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번
우번(虞翻, 164년 ~ 233년[1])은 중국 후한 말 ~ 동오의 정치가로, 자는 중상(仲翔)이며 양주(揚州) 회계군(會稽郡) 여요현(餘姚縣) 사람이다.
생애
《역경》에 밝은 학자로, 지모가 뛰어났다. 별전에 따르면 영릉태수를 역임한 고조부 우광 대부터 맹씨역(孟氏易)을 가학으로 다루어 왔다고 한다.[2]
처음에는 회계태수(會稽太守) 왕랑(王朗)을 섬겼다. 왕랑이 손책(孫策)에 패배하여 남쪽으로 도망가자, 이를 따라 왕랑을 호위하였으나 왕랑의 권유로 회계에 머물렀고, 손책에게 초빙되어 임관에 응하였다.
손책의 밑에서 계속 회계의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예장태수(豫章太守) 화흠(華歆)을 설득하여 항복시켰다. 손책이 죽자 그의 동생 손권(孫權)을 섬겼으며, 낙양(洛陽)에 있는 당시 최대 군주인 조조(曹操)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공융(孔融)과 장굉(張紘)으로부터 재능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육적(陸績)과는 친구 관계였다.
우번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 주장을 관철한 인물로, 유비(劉備)를 배신한 미방(糜芳)과 관우(關羽)에게 항복한 후 오(吳)의 보호를 받은 우금(于禁)을 면전에서 비난하였다. 주군 손권에 대해서도 잘못된 행동을 하면 반드시 말하였다. 손권이 오나라 대국왕(吳大國王)이 되어 축하연이 벌어졌다. 술을 좋아한 손권은 자진하여 술잔을 돌렸는데, 우번은 취하여 쓰러진 척하여 마시지 않았다. 손권이 지나가자 우번은 태연히 일어났고, 이에 분노한 손권은 우번을 죽이려 하였다.
이때 유기(劉基)의 중재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얼마 후 신선에 대하여 손권과 장소(張昭)가 이야기하는 것을 언뜻 듣고는 "죽은 자들이 신선에 대하여 논하고 있군요. (불로불사의) 신선은 있을 리가 없을텐데 말입니다"라고 말하며 조롱하였다. 이러한 일이 거듭되자 손권은 우번을 교주(交州)로 쫓아내었다. 우번은 교주에서 수백 명의 문하생들을 상대로 광효사(光孝寺)에서 학문을 가르쳤다. 그 후 다시는 중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오서에 따르면 훌륭한 무예를 가지고있었다. 오서에서 이르길
손책이 산월을 토벌하여 그 우두머리를 죽이고 가신들에게 나누어 적을 쫒아가라 빠짐없이 명하곤 단기로 우번을 만나 산중에서 노닐었다. 우번이 가신들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손책이 말하길,
"모두 적을 쫒으러 갔소." 하니, 우번이 "큰 일이 아닙니까!" 하며 손책에게 말에서 내리라 했다. "여긴 풀숲 깊은 곳이라 졸지에 화급한 일이 생기면 말새퀴로는 진영에 다다를 수 없으니 다만 끌고 가야 합니다. 시위에 활을 먹이고 걸어가십시오. 이 우번이 창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바, 청컨대 앞서 가게 해주십시오." 평지가 나오자, 손책에게 말에 오르라 권했다. 손책이 "경은 말도 없이 어찌하려오?" 하자 답하길, "이 우번이 (또) 걷는데는 도가 터 하루에 300리도 딛습니다. 정토에 나선 이래로 이졸 가운데서도 이 사람에게 미친 자가 없었습니다. 명부께서 시험삼아 말을 달려보십시오. 이 우번은 걸음으로 말(馬)을 따라가며 말소리(音聲)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달려가다보니 큰 길에 다다러 관리 하나를 만났는데 손책이 뿔나팔을 취해 불어제끼니 마을에서 소리를 알아듣고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나왔다. 마침내 주선하는 일을 따르며 3군을 평정했다.[3]
《삼국지연의》 속 우번
손책에게 항복할 것을 왕랑에게 진언하였으며, 이 일로 미움을 사 왕랑의 곁을 떠난다.
또한, 부사인(傅士仁)의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우번의 친족관계
관련 인물
각주
- ↑ 삼국지 우번전에 의하면 우번의 유배기간은 10년이라고 한다.
- ↑ 진수: 《삼국지》 권57 우육장낙육오주전 - 배주로 인용된 《(우)번별전》: 臣高祖父故零陵太守光,少治孟氏易,曾祖父故平輿令成,纘述其業,至臣祖父鳳為之最密。臣亡考故日南太守歆,受本於鳳,最有舊書,世傳其業,至臣五世。
- ↑ [원문은 江表傳曰:策討黃祖,旋軍欲過取豫章, 特請翻語曰:「華子魚自有名字,然非吾敵也。加聞其戰具甚少,若不開門讓城,金鼓一震,不得無所傷害,卿便在前具宣孤意。」翻即奉命辭行,徑到郡,請被 〈衤冓〉葛巾與(敵)〔歆〕相見,謂歆曰:「君自料名聲之在海內,孰與鄙郡故王府君?」歆曰:「不及也。」翻曰:「豫章資糧多少?器仗精否?士民勇果孰與 鄙郡?」又曰:「不如也。」翻曰:「討逆將軍智略超世,用兵如神,前走劉揚州,君所親見,南定鄙郡,亦君所聞也。今欲守孤城,自料資糧,已知不足,不早為 計,悔無及也。今大軍已次椒丘,僕便還去,明日日中迎檄不到者,與君辭矣。」翻既去,歆明旦出城,遣吏迎策。策既定豫章,引軍還吳,饗賜將士,計功行賞, 謂翻曰:「孤昔再至壽春,見馬日磾,及與中州士大夫會,語我東方人多才耳,但恨學問不博,語議之間,有所不及耳。孤意猶謂未耳。卿博學洽聞,故前欲令卿一 詣許,交見朝士,以折中國妄語兒。卿不願行,便使子綱;恐子綱不能結兒輩舌也。」翻曰:「翻是明府家寶,而以示人,人倘留之,則去明府良佐,故前不行 耳。」策笑曰:「然。」因曰:「孤有征討事,未得還府,卿復以功曹為吾蕭何,守會稽耳。」後三日,便遣翻還郡。臣松之以為王、華二公於擾攘之時,抗猛銳之 鋒,俱非所能。歆之名德,實高於朗,而江表傳述翻說華,云「海內名聲,孰與於王」,此言非也。然王公拒戰,華逆請服,實由孫策初起,名微眾寡,故王能舉 兵,豈武勝哉?策後威力轉盛,勢不可敵,華量力而止,非必用仲翔之說也。若使易地而居,亦華戰王服耳。按吳歷載翻謂歆曰:「竊聞明府與王府君齊名中州,海 內所宗,雖在東垂,常懷瞻仰。」歆答曰:「孤不如王會稽。」翻復問:「不審豫章精兵,何如會稽?」對曰:「大不如也。」翻曰:「明府言不如王會稽,謙光之 譚耳;精兵不如會稽,實如尊教。」因述孫策才略殊異,用兵之奇,歆乃答云當去。(此說為勝也)翻出,歆遣吏迎策。二說有不同,〔此說為勝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