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싸여 있던 셀린느의 한국 플래그십 스토어(대표 매장)이 서울 청담동에 모습을 드러냈다. 셀린느는 2019년 뉴욕 매디슨 애비뉴 부티크를 시작으로 전 세계 매장에 브루탈리즘을 내세운 새로운 건축 및 디자인 콘셉트를 적용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공개된 매장 역시 그 바통을 이어받아 시대를 초월한 브랜드 미학을 오롯이 담아냈다.
지난해 11월 29일, 서울 청담동에 모습을 드러낸 셀린느 청담 플래그십 외관. 기하학적인 구조와 커팅된 글라스를 적용한 비스포크 파사드가 특징이다. 사진 셀린느
7개 층 규모의 셀린느 건물은 기하학 패턴의 파사드가 멀리서도 시선을 끌었다. 890㎡(약 270평) 규모로 지상부터 2층까지는 개방감이 느껴지는 투명 유리를, 위층부터는 유색 유리를 설치해 점진적인 시각 효과를 줬다. 파리는 19세기 도시 계획에 따라 건물 대부분 아연 소재의 지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번 매장 기둥에 동일 자재를 활용했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 거주 중인 프랑스 출신 전문가가 제작에 참여했다. 내부는 최고급 천연 소재로 마감한 점이 눈에 띈다. 그레이 트래버틴, 그랜드 앤티크 마블 등 다양한 천연 대리석과 목재·황동·앤틱 골드 거울과 같은 금속 소재를 과감하게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커팅 글라스로 구조적인 모던함을 연출했다. 사진 셀린느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 미학에서 영감을 얻은 매장의 인테리어. 천연 대리석과 목재, 앤틱 골드 거울 등을 조합해 대조미를 이끌어냈다. 사진 셀린느
소재의 질감을 극대화하고 모듈화된 패턴을 적용한 점은 20세기 중반 전성기를 맞았던 브루탈리즘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다. 건축계의 거장, 르코르뷔지에가 프랑스어로 일컬은 ‘가공되지 않은 콘크리트(Bétonbrut)’에서 유래한 브루탈리즘은 80년대 이후 점차 사그라들었지만, 최근 새로운 미감을 더해 부흥을 맞았다. 이번 플래그십 스토어는 자연 소재의 질감과 무게감이 느껴지는 21세기형 브루탈리즘 양식을 바탕으로 우아함과 절제미를 더해 셀린느만의 고급스러운 감각을 한껏 끌어냈다.
매장 내부에는 셀린느가 직접 선정한 빈티지 가구와 예술 서적이 놓였다. 사진 셀린느
플래그십 스토어 답게 셀린느의 전 컬렉션을 폭넓게 소개하는데, 층마다 구성을 다채롭게 꾸린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여성용 레더 제품과 메종 컬렉션이 전시된 1층과 여성용 액세서리·레디투웨어·슈즈 등이 진열된 2층과 3층은 밝고 세련된 분위기로 연출했다. 특히 2층에는 지난해 첫선을 보인 뷰티 라인인 ‘셀린느 보떼’의 립스틱들이 화려하다. 지하 1층은 남성 컬렉션 전용 공간으로 검은 계단과 네온 조명, 어두운 컬러의 대리석 벽면으로 모던함을 강조했다. 의류뿐 아니라 각종 액세서리와 레더 제품, 펫 라인까지 다양한 제품으로 눈을 즐겁게 한다. 4층으로 올라서면 프라이빗 전용 공간을 만날 수 있다. 특별히 선별한 빈티지 가구 및 제작 가구들로 채워진 공간으로 기능적으로나 미적으로도 플래그십 스토어의 핵심을 담았다.
(왼) 카프 스킨과 레오파드 프린트 조합이 특징인 ‘미니 16백’. 청담 플래그십 단독으로 만나볼 수 있다. (오) 2025년 셀린느의 신제품, 보니 백팩. 사진 셀린느
셀린느는 이번 개점을 기념하며 전 세계에서 오직 청담 플래그십에서만 만날 수 있는 네 가지의 익스클루시브 백을 준비했다. 모두 브랜드의 시그니처 제품인 ‘16백’으로, 이름은 셀린느의 파리 본사 주소지인 비비엔느 거리 16번가에서 따왔다. 프랑스어로 ‘세즈백’이라고도 불린다.
개점을 기념해 방문한 셀린느 앰배서더 박보검·수지·뉴진스의 다니엘·TWS(투어스). 사진 셀린느
플래그십 스토어를 거닐다 보면 인테리어나 진열 외에도 공간을 특별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예술품이다. 셀린느는 2019년부터 전 세계 매장에 현대미술 작품을 선보이는 ‘아트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단지 매장을 고급스럽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공간의 콘셉트와 절묘하게 어우러지거나 혹은 작품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새로운 공간 미학을 추구한다. 때문에 유명한 조각가부터 실험적인 설치미술가까지 다루는 작가의 폭이 넓은데, 지금까지 작가 100여 명, 작품 250점 이상을 선보여 왔다.
매장 곳곳에서 셀린느의 아트프로젝트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왼쪽 대형 기둥은 루카스 제로니머스의 ‘반스달 컬럼’, 오른쪽의 하얀 추상 조각은 엘리 핑 작가의 ‘모노카프’.
이번 한국 매장에는 어떤 작품이 전시됐을까. 1층에서 시선을 끄는 작품은 캐나다 출신 조각가 루카스 제로니머스의 기둥 조각 ‘반스달 컬럼’이다. 작가는 평범한 건축 자재를 가지고 가구 같은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기술을 지녔다. 외관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소재의 원래 상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조직적이다. 나무와 알루미늄, 철 소재의 기둥은 브루탈리즘 양식의 매장 콘셉트와 맥이 닿는 동시에 독자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미국 출신 작가 엘리 핑은 비정형적인 형태의 조각 ‘모노카프’로 공간에 가벼운 긴장감을 부여한다. 모노카프는 죽기 전 단 한 번만 꽃을 피우는 식물에서 이름을 땄다. 작가는 유화를 그릴 때 쓰는 캔버스 천을 공중에 매달고 합성수지인 레진을 부어 그대로 형상을 굳힌다. 잡아당겨 늘린 듯한 기묘한 형태는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 기인한다. 천의 끝부분인 작은 면적만으로 무게를 지탱하는 모습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앙상하고 가늘은 조각상을 떠올리게 한다.
블랙의 시크함이 강조된 지하 1층 남성 컬렉션 공간에는 한국 1세대 조각가, 김윤신의 나무 조각이 존재감을 빛낸다. 사진 셀린느
지하 1층에는 한국 여성 조각가 1세대인 김윤신 작가의 조각이 놓였다. 1935년생인 작가는 40여년간 아르헨티나를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조각 및 회화 작품을 선보여왔다. 대표작은 자연의 순리와 음양의 조화가 깃든 나무 소재 조각이다. 특히 70년대 시작한 연작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은 나무와 예술가의 혼이 결합하고 나뉘며 세상의 이치를 드러낸다는 그의 예술 철학을 잘 드러낸다. ‘더하다’와 ‘나누다’는 음과 양의 개념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덩어리 상태의 목재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형상을 끄집어내듯이 작품을 만든다. 나무의 껍질과 결, 속살이 그의 손에 의해 새로운 오브제로 탄생한다. 매장 한편, 나무 좌대에 올려진 그의 작품이 거칠고 묵직한 삶의 숨결을 뿜어낸다. 이밖에 벤자민 랄리에·매트 브라우닝·존 더프·니콜라 마티니의 작품이 매장 곳곳 자리한다. 최첨단의 디자인이 적용된 공간과 예술 작품이 어우러지는 광경을 마주하는 것도 셀린느 플래그십 스토어만의 특별함이다.
이소진 기자 lee.sojin2@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