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3세
펠리페 3세
| |
---|---|
스페인 국왕 포르투갈 국왕 | |
재위 | 1598년 9월 13일 ~ 1621년 3월 31일 |
전임 | 펠리페 2세 |
후임 | 펠리페 4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78년 4월 14일 |
출생지 | 스페인 마드리드 |
사망일 | 1621년 3월 31일 | (42세)
사망지 | 스페인 마드리드 |
가문 | 합스부르크 왕가 |
부친 | 펠리페 2세 |
모친 | 오스트리아의 아나 |
배우자 |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 |
종교 | 로마 가톨릭 |
묘소 | 스페인 |
펠리페 3세(Felipe III, 1578년 4월 14일 ~ 1621년 3월 31일)는 스페인의 국왕 겸 포르투갈의 국왕이다. 포르투갈에서는 필리피 2세(Filipe II)로 불린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그의 네 번째 아내이자 조카딸인 안나의 아들이다. 펠리페 3세는 자신과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족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드 2세 황제의 누이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였다.
생애
[편집]펠리페 3세는 하루 14시간 이상을 집무실에서 보낸 아버지 펠리페 2세와는 달리 정치를 싫어했고 대부분의 업무를 총신 레르마 공작에게 맡겼다.[1] 레르마 공작은 펠리페 3세가 즉위하자마자 선왕 펠리페 2세의 수석대신을 리스본으로 쫓아내고 자신의 삼촌을 톨레도 대주교로 앉히는 등 자신의 친구와 친척들을 요직에 임명했다.[2] 레르마 공작은 게으른 인물로 복잡한 정책보다는 무난하고 손쉬운 일처리를 원했으며 그의 체제하에서 펠리페 3세와 신하들은 사치스러운 궁정생활을 즐기느라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2]
1601년 레르마 공작은 수도를 바야돌리드로 옮겼으나 1609년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같은 해 4월 9일에 네덜란드와의 휴전협정이 맺어졌으며 같은 날 펠리페 3세는 모리스코들에 대한 추방령을 내렸다.[3] 발렌시아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12만명, 아라곤에서 7만명, 안달루시아에서 8만명, 카스티야에서 3만명 총 3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스페인에서 빠져나갔는데 이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농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1] 농사를 지을 모리스코들이 사라지면서 비옥한 농지들 대부분이 버려졌고 짐꾼, 마부 등 궂은 일을 할 인력도 없어졌다.[2] 펠리페 3세의 치세부터 스페인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녀
[편집]- 안 도트리슈(1601 ~ 1666) 프랑스 왕비(루이 13세와 결혼)
- 마리아(1603년)
- 펠리페 4세(1605 ~ 1665)
- 마리아 안나(1606 ~ 1646)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페르디난트 3세와 결혼)
-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1609 ~ 1641) 추기경
- 마르가리타(1610년)
- 알폰소(1611년)
각주
[편집]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