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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논문 http://dx.doi.org/10.16894/JOWH.52.1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자본주의의 서막인가?* 남 종 국** I. 서론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유저리(usury)는 지나치게 높은 이자를 받 는 대부, 즉 고리 대금이며 법으로 인정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이자를 수 취하는 불법적인 대부를 뜻한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원인 라틴어 우수라 (usura)는 고리 대금뿐만 아니라 고리이건 저리인건 상관없이 이자를 받는 모든 대부를 포괄하는 용어였다. 4세기 후반 히에로니무스는 “빌려준 것보 다 더 많이 받았을 경우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수라(usura)로 불려야 한 다.”고 말했으며, 암브로시우스는 우수라를 “준 것보다 더 많이 받는 것” 으로 정의했다.1) 12세기 중엽 기존의 교회법을 모아 교회법령집을 편찬한 볼로냐 출신의 그라티아누스도 우수라를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는 행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4S1A5A2A01016160). 원 과제명: 고리 대금과 자본주의의 탄생. **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1) J. Le Gof, La bourse et la vie(Paris, 1986), 김정희 역, 『돈과 구원』(이학사, 1998), p.33. 5 6 서양사연구 제52집 위로 정의했다.2) 15세기 잉글랜드의 교회법도 “빌려준 것보다 무게, 수량 이나 금액에서 더 많이 받는 모든 행위에서 우수라가 발생한다.”고 규정했 다.3) 따라서 중세말까지도 여전히 서유럽에서 우수라는 고리 대금뿐만 아 니라 이자를 받는 모든 대부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교회가 이자 대부 금지라는 교리를 잠정적으로 버린 것은 19세기 초엽 이었고, 공식적으로는 1917년에야 지나친 이자 대부만을 우수라로 규정하 게 되었다.4) 교회는 이자 대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아주 뒤늦게 사후승인을 한 것이었다. 단어의 의미 변화와 동시에 이자 대부를 둘러싼 사회적 종교적 인식도 변화했다. 오늘날에는 지나칠 정도로 높은 이자 대 부 즉 고리 대금을 제외한 이자 대부에 대해서 종교적, 도덕적 비난이 존재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면서 법적 처벌의 두 려움이나 양심적인 가책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자 대부에 대한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비난이나 제재는 거의 사라졌다.5) 반면 중세 서유럽 기독교 사회에서는 모든 이자 대부가 혐오스런 행위이 자 종교적인 죄악이었다.6) 교회는 이자 대부가 신의 질서를 거스르는 죄악 2) J.W. Baldwin, he Medieval theories of the just price. Romanists, canonists, and theologians in the twelth and thirteenth centuries, in Transaction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new series vol. 49, part 4(Philadelphia, 1959), p. 35; 남종 국, 「12세기 교회법학자 그라티아누스의 경제 윤리」, 『대구사학』, 112집(2013). 3) G. Seabourne, “Controling commercial morality in late medieval London: the usury trial of 1421,” he Journal of Legal History, vol.19(1998), p.132. 4) L. Armstrong, “Usury,” J. Mokyr, ed., Oxford Encylopedia of Economic History(New York, 2003), vol.5, p.184. 5) 그런 종류의 사고가 일정 정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높은 이율 즉 고리 대금에 한정된 것이다. 고리 대금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때론 법적으로 제제를 받 고 있다. 6) 이자 대부를 다룬 대표적인 연구들은 다음과 같다. G. Le Bras, “Usure: la doctrine ecclésiastique de l’usure à l’époque classique(XIIIe-XVe siècle),” Dictionnaire ecclésiastique catholique(Paris, 1908-1950), vol.15, cols.2336-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7 중의 죄악이며 사회적으로 근절해야 할 악행이라고 가르쳤으며, 이자 대부 업자에게는 성찬식 참여와 교회 묘지 매장을 금지했고 종종 공동체로부터 의 파문과 추방을 명했다.7) 또한 이자 대부업자는 죽은 후에도 지옥의 벌 을 감수해야 했다. 1300년경 단테는 지옥에서 고통 받는 이자 대부업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이자 대부 업자의 모습 은 당시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었다. 게다가 이자 대 부업자는 교회와 세속 권력이 가하는 여러 법적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이 자 대부를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8) 이자 대 부를 허용하고 이자 대부업자에게 숙소와 영업장을 제공한 도시는 성무 금지를, 자신의 영토에서 이자 대부업자를 쫓아내지 않은 제후들은 파문을 2372; T.P. McLaughlin, “he teaching of the canonists on usury(XII, XIII, and XIV centuries),” Mediaeval Studies, vol.2(1940), pp.1-22; J. T. Noonan, he scholastic analysis of usury(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57); Baldwin, he Medieval theories; J. Ibanès, La doctrine de l’église et les réalités économiques au XIIIe siècle: l’intérêt, les prix et la monnaie(Paris, 1967); J. Gilchrist, The church and economic activity in the Middle Ages(New York, 1969); L.K. Little, Religious poverty and the profit economy in medieval Europe (Ithaca, 1978); A. Spicciani, Capitale e interesse tra mercatura e povertà nei teologi e canonisti dei secoli XIII-XV(Roma, 1990); O. Langholm, Economics in the medieval schools, wealth exchange, value, money, and usury according to the Paris theological tradition 1200-1350(Leiden: Brill, 1992); J. Kaye, Economy and nature in the fourteenth century: money, market exchange, and the emergence of scientiic thought(Cambridge, 1998); S.L. Buckley, Teachings on usury in Judaism, Christianity and Islam(New York, 2000); G. Todeschini, “Usury in Christian middle Ages. A reconsideration of the historical tradition(1949~2010),” F. Ammannanti, ed., Religion and religious institutions in the European economy, 1000-1800(Firenze, 2012), pp.119-130. 7) Gilchrist, he church, pp.62-70. 8) 존엄 왕 필리프(필리프 2세)는 이자 대부업자로 판명이 난 자가 잘못을 교정하 지 않을 경우 그 재산은 왕령지에 편입된다고 공포했다. Ibanès, La doctrine de l'église, p.89. 8 서양사연구 제52집 당하기도 했다.9) 그렇다면 이자 대부를 죄악시하는 중세 기독교 사회의 윤리적이며 종교 적인 경제관념이 이자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현대 자 본주의적 경제관념으로 언제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자 대부를 금지하는 교회의 가르침은 아주 오랫동안 유럽 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0) 중세 경제사가 루버(Raymond de Roover)에 따르면 이러한 교회의 경제 윤리는 중세 서유럽에서 거래 방식, 사업 조직 및 상인들의 태도를 결정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었다.11) 9) 이러한 벌칙은 1311년 비엔나 종교회의 결정이었다. Ibanès, La doctrine de l’église, p.89. 10) 13세기 플랑드르 지방을 연구한 빅우드는(Bigwood)는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교 회, 도시 정부와 군주들이 모두 이자 대부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고 이자 대부를 근절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노력했다고 말한다. 헴홀츠(Helmholz)는 잉글 랜드의 교회 법정에서 이자 대부업자에 관한 소송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를 분 석해 이자 대부업자에 대한 교회의 처벌이 매우 드물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시 본(Seabourne)은 15세기 초반 런던의 왕실 법정에서 이루어진 이자 대부 소송 을 분석해 15세기 초까지도 이자 대부 금지법이 결코 사문화되지 않았다는 결론 을 내렸다. 암스트롱(Armstrong)은 신고전경제학의 영향을 받은 많은 역사가들 이 이자 대부 금지가 중세 유럽인들의 경제 활동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해 석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틀리다고 주장한다. G. Bigwood, La régime juridique et économique du commerce de l’argent dans la Belgique du Moyen Age(Brussels, 1991-1992); R.H. Helmolz, “Usury and the medieval English church courts,” Speculum, vol.61(1986), pp.366-380; Seabourne, “Controling commercial morality,” pp.116-142; L. Armstrong, “Usury, conscience and public debt: Angelo Corbinell’s testament of 1419,” J.A. Marino and T. Kuehn, eds., A Renaissance of conlicts: visions and revisions of law and society in Italy and Spain (Toronto, 2004), p.176. 11) 루버는 이자 대부 금지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를 다음 3가지로 제 시한다. 첫째는 상인들이 이자 대부 금지법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 과 정에서 일정정도 비용을 지불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비용이 상업의 종 류와 상인에 따라서 달라졌다는 것이다. 셋째는 대부업자들이 이러한 교회 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못했고 가능하면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R. De Roover, Business, banking, and economic thought in late medieval and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9 프랑스 중세사가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는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을 자본주의의 출산 과정으로 묘사한다. 르 고프는 이자를 죄악시하 는 중세 교회의 윤리적 경제관념이 자본주의의 탄생을 저해하고 지체시켰 다고 말한다.12) 그의 주장처럼 이자 대부를 죄악시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지켰다면 이자 대부를 전문적으로 하는 근대 은행은 출현하지 못 했거나 매우 느리게 나타났을 것이다. 이자 대부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이 윤 추구 욕구 또한 범죄시하는 종교 윤리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면 베버 가 정의한 합리적인 이윤추구라는 자본주의 정신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 다.13) 반면 이자 대부에 대한 규제가 중세 상업 활동이나 교역에 큰 영향을 미 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금지 대상 이 된 이자 대부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에게 꽤 높은 이자를 받고 돈 을 빌려주는 고리 대금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규모의 상업이나 자본주 의 성장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법은 투자나 상 업 활동을 위한 대부의 경우에는 이자를 허용했으며, 대중들도 이자 대부 에 대한 규제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14) 그런 연유로 킨들버거 early modern Europe(Chicago, 1974), p.185; Idem, “The scholastics, usury, and foreign exchange,” he Business History Review, vol.41(1967), p.265; M. Koyama, “Evading the taint of usury: complex contracts and segmented capital markets,” Explorations in Economic History, vol.47(2010), pp.1-2. 12) 『돈과 구원』, p.95. 13) M. Weber, 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김덕영 역, 『프로테스 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도서출판 길, 2010), pp.600-610. 14) 샤츠밀러(Shatzmiller)는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지방에서 이자 대부 금지 운 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를 연구했다. 그는 교회가 원론적으로 이자 대부를 금했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합리적인 수준의 이자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고 말한다. 스피차니(Spicciani)는 화폐를 기반으로 한 도시 경제가 발달하면서 교회는 점차 이자 대부를 용인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J. Shatzmiller, Shylock reconsidered: Jews, moneylending, and medieval society(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Spicciani, Capitale e interesse. 10 서양사연구 제52집 (Charles Kindleberger)는 이자 대부는 경제사보다는 사상사의 영역에 속 한다고 지적했다.15) 위펠스는 미국에서 볼스테드 법(Volstead Act)이 술 소 비를 막지 못했듯이 13세기 플랑드르에서도 이자 대부를 금하는 교회의 가르침이 이자 대부 행위를 막지 못했다고 말한다.16) 위의 논쟁을 마무리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해답을 얻으려면 이자 대 부를 죄악시하는 중세 교회의 경제 윤리와 사회적 처벌이 자본주의 탄생 을 막았을 정도로 막강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12~4세기 서유럽 기독교 사회가 어떤 근거와 방법으로 얼마만큼 강력하게 이자 대부를 규제했는지를 우선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 식에서 출발해 본론에서는 이자 대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형성되는 과 정을 일차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으로 왜 중세 서유럽 기독교 사회 가 12~4세기에 이자 대부에 대한 공세의 수위를 높이게 되었는지, 그러한 공세가 얼마나 강력하고 효과적이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 논문은 이자 대부를 금하는 중세 서유럽 사회의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경제 관념이 자본주의 탄생과 발전에 심각한 장애로 작용했다는 르 고프를 포 함한 여러 역사가들의 거시적인 해석이 타당한지를 검증하는데 필요한 1차 기초 작업이 될 것이다. 논쟁을 마무리할 최종적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이자 대부업자들이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과 사회적 처벌을 어떻게 받아들 이고 대응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는 다음 논문에서 다룰 예정이다. 15) C. Kindleberger, A inancial history of western Europe(London, 1984), p.41; J.H. Munro, “he medieval origins of the inancial revolution: usury, rentes, and negotiability,” Munich Personal RePEc Archive, no.10925(2008), pp.506-507. 16) C. Wyfels, “L’usure en Flandre au XIIIe siècle,” Revue Belge de Philologie et d’Histoire, vol.69(1991), p.871.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11 II. 이자 대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탄생 사실 이자 대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관념은 역사가 아주 오래 되었 으며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했었다. 고대 유대인 사회뿐만 아니라 고대 그 리스에서도 이자 대부를 비판하는 사상가들이 있었다. 아테네의 철학자 아 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소득 중에서 이자 대부가 가장 부자연스러운 소득이 라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돈은 교환을 매개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에 이 를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은 돈의 고유한 기능이자 목적(텔로스telos)에 어긋 나는 행위였다. 또한 돈은 가축이나 과일 나무와는 달리 생산적이지 못하 기 때문에 돈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 즉 이자를 취하는 것은 합당하 지 못하다는 것이다.17) 하지만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이자를 받는 것은 합 법적인 행위였으며, 이에 대한 윤리적 비난이 크게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으 로 추정된다.18) 중세 서유럽 기독교 사회가 이자 대부를 죄악시한 좀 더 직접적인 근거 는 유대교의 전통이었다.19) 구약 성서의 신명기 23장에 따르면 “너희는 동 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한 이자든 곡식에 대 한 이자든, 그 밖에 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이방인에 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도 되지만, 너희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 어서는 안 된다.” 출애굽기(22장), 레위기(25장), 시편(15편)과 에스겔(18 장) 또한 동족과 불쌍한 이웃에게 이자 대부를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20) 17) S.J. Grabill, ed., Source book in late scholastic monetary theory(Lanham, 2007), p.xxix-xxx; Simon Ravenscrot, “Usury in the Inferno: auditing Dante’s debt to the scholastics,” Comitatus: A Journal of Medieval & Renaissance Studies, vol. 42(2011), p.96. 18) Robert P. Maloney, “Usury in Greek, Roman and Rabbinic thought,” Traditio, vol.27(1971), p.79-86. 19) Buckley, Teachings on usury, p.1; Noonan, he scholastic analysis, p.11. 20) Buckley, Teachings on usury, pp.2-4; 『돈과 구원』, pp.25-28. 12 서양사연구 제52집 이 구약의 가르침은 이후 유대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교에도 엄청 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까지도 일부 종파 사람들에게는 이자를 죄악 시하는 관념이 남아 있다.21) 중세 초기에는 주로 구약이 이자 대부를 부정 하는 근거로 인용되다가 11세기 이후에는 신약 또한 준거로 활용되었다.22) 누가복음은(6장)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주어라(Mutuum date, nihil inde sperantes)”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에서 금하는 이자 대부는 이후 다양한 종교적 저주와 비난, 사회적 멸시와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성경에서 출발해 초기 교부들, 종교회 의 그리고 신학자들도 이자 대부에 대한 여러 부정적인 인식을 만들어냈 다.23) 무엇보다도 교회는 이자 대부를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을 받을 수 없 는 치명적인 죄악으로 만들었다. 부당하게 수취한 이자를 원주인에게 돌려 주지 않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자 대부업자는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 이라고 가르쳤다. 6세기 한 작가(Pseudo-Chrysostom)는 모든 상인중에서 가장 저주받을 자는 하느님이 주신 것을 팔아먹는 이자 대부업자라고 말 했다.24) 이자 대부는 그 자체로 죄악으로 간주되었다. 기욤 도세르는 “이자 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그 자체로 죄악이라.”라고 말했다.25) 중세 기독교가 이자 대부를 죄악시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칠죄종 중의 하나인 탐욕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상인이 이자 대부를 하 는 이유는 부당한 이윤을 얻어 부자가 되려는 탐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 에 이자 대부는 근원적인 죄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세기 교황 21) 현재에도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는 이자(리바 riba)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수쿠 크(sukuk)라 불리는 일종의 채권을 발행하고 이 채권의 수익을 배당금 형태로 투 자자들에게 지급하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22) Noonan, he scholastic analysis, p.11. 23) J.H. Moore, “Pope Innocent III and usury,” F. Andrews, C. Egger, and C.M. Rousseau, eds., Pope, church and city. Essays in honour of Brenda M. Bolton (Leiden: Brill, 2004), p.60. 24) D. Wood, Medieval economic thought(Cambridge, 2002), pp.160-161. 25) 『돈과 구원』, p.35.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13 레오 1세는 이자는 수치스러운 획득물(turpe lucrum)이기 때문에 성직자 뿐만 아니라 속인들도 이런 탐욕의 죄를 범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26) 게다 가 중세 초기에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죄악은 교만이었지만 12세기에 이 르러 탐욕이 가장 큰 죄로 부상하게 되면서 탐욕에서 발생하는 이자 대부 는 더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27) 이자 대부업자는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 으로 간주되었다. 이 용서받지 못할 범죄는 바로 도둑질이었으며 이자 대 부업자는 가장 사악한 도둑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자 대부를 도둑질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부터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중세 초기에 이자 대부를 절도 행위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28) 중세 초기의 유명한 교부였던 암브로시우스는 “이자를 받는 자는 도둑질 을 하는 것이다.”라면서 이자 대부를 도둑 행위로 비난했다. 캔터베리 대주 교를 지낸 이탈리아 출신의 신학자 안셀무스(1033~1109) 역시 이자 대부 와 도둑질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그의 제자였던 루카 출신의 동명의 안셀 무스는 이자 대부는 도둑질하지 말라는 7계명을 어긴 죄이기 때문에 구원 을 받으려면 훔친 돈을 반환해야 한다고 좀 더 명확하게 피력했다. 12세기 중엽 피에트로 롬바르도는 초기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와 히에로니무스 를 인용하면서 이자 대부를 절도죄로 해석했다.29) 12세기 중엽 『교회법령 26) Noonan, he scholastic analysis, p.15. 27) M.W. Bloomfield, The seven deadly sins.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a religious concept with special reference to medieval english usurers(Michigan, 1952), p.183. 28) A. Kirschenbaum, Equity in Jewish law. Beyond equity: Halakhic aspirationism in Jewish civil law(New York, 1991), p.27. 29) 이후 작센 출신의 철학자 위그 드 생빅토르(1096~1141),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 피에르 르 망죄르(Pierre Le mangeur, 1178년경), 이탈리아 출신의 피에트로 롬바 르도(1160년경)도 안셀무스의 견해를 공유했다. Noonan, he scholastic analysis, p.17; L.J. Smith, he Ten Commandments: interpreting the Bible in the Medieval world(Leiden, 2014), p.143. 14 서양사연구 제52집 집』을 편찬한 교회법학자 그라티아누스는 이자 대부를 절도 행위로 간주 했다. 잉글랜드 출신의 성직자였던 토마스 촙햄(homas of Chobham)과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이자 대부를 도둑질로 간주했다.30) 게다가 이자 대부는 단순히 타인의 물건을 훔친 도둑질 정도가 아니라 신의 것을 강탈한 특별히 가증스러운 절도 행위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다 수의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이자 대부업자가 채무자에게 파 는 것은 자신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에게 속한 시간을 팔아 이자를 취한 것이다. 13세기 초 한 『예화 일람』은 이자 대부업자가 얼마나 사악한 도둑질을 행하는지와 그러한 도둑질로 영원한 휴식과 구원을 받지 못함을 설파했다.31) “이자 대부업자를 도둑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소유가 아닌 시간을 팔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소유주의 의사에 반 하여 파는 것은 도둑질이다. 게다가 그들은 돈에 대한 기다림, 즉 시간 외 에는 아무것도 팔지 않으니 결국 낮과 밤을 파는 격이 된다. 그러나 낮은 광명의 시간이요 밤은 휴식의 시간인 까닭에, 결과적으로 그들은 빛과 휴 식을 파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영원한 빛과 휴식을 갖는 것 은 부당하다.” 이자 대부는 자연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정의롭지도 못하며 부당하고 사 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기욤 도세르는 이자 대부가 자연법에 어긋난다고 비난했다. 스콜라 신학자들 역시 이자 대부가 자연법의 정의에 위배된다고 설교했으며 그 중 아퀴나스는 대부의 본질은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줌으로써 돈의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소유 30) E. Friedberg, ed., Corpus juris canonici(Leipzig, 1879~1881), p.738(causa XIV, q.4); T.E.L. Chubb and E. Kelly, “Mendicants and merchants in the Medieval Mediterranean: an introduction,” T.E.L. Chubb, ed., Mendicants and merchants in the Medieval Mediterranean(Leiden, 2012), p.21; 남종국, 「12세기 교회법학자」, 144쪽. 31) 『돈과 구원』, p.53.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15 가 아닌 돈을 이유로 이자를 받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지적했다.32) 최종적으로 이자 대부업자는 신의 질서 즉 자연을 거스르는 대죄를 범 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어 갔다. 그런 연유로 단테는 남녀가 사랑 하라는 신의 뜻이자 자연적인 질서를 어기고 동성애를 저지른 남색자들과 이자 대부업자들을 동일한 부류의 범죄자로 취급했던 것이다.33) III. 12~13세기 이자 대부에 대한 공세 1. 이자 대부에 대한 교회의 공세 사회 경제적 구조가 변하면 그에 맞춰 생각과 관념 또한 변하기 마련이 다. 농업 위주의 자급자족적인 경제 체제인 장원제도 하에서 이자 대부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사안이 아니었기에 이를 진지하게 논의하거 나 규제하려고 하지 않았다. 12세기 이전 종교회의에서 이자 대부를 논의 한 것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가 유일했고, 규제의 대상이 된 행위는 일 반인이 아니라 탐욕에 눈이 먼 성직자들의 이자 대부 행위였다.34) 하지만 11세기 이후 서유럽이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 점진적으로 경제적 성장을 경 험하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도시와 상업이 발전하면서 이자 대부는 자연스럽게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상업 발전을 선도했던 12세기 베 네치아, 제노바, 피사와 같은 이탈리아 상업 도시에서는 이자 대부 계약이 일상화되었다.35) 32) Kirschenbaum, Equity, pp.26-28. 33) 『돈과 구원』, p.68. 34) H.J.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of the General Councils(London, 1937), pp. 47-48. 35) 이탈리아 문서고에는 당시 작성된 많은 이자 대부 계약서들이 남아 있다. 이중 일 부는 출판되었다. 16 서양사연구 제52집 이탈리아 도시 출신의 이자 대부업자들은 활동 영역을 프랑스와 잉글랜 드 등지로 확대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북·중부 이탈리아 도시에서 온 이들 이자 대부업자들을 ‘롬바르디아 놈들’이라는 경멸적인 용어로 불렀다. 12세기 후반 파리 대학 신학부 교수였던 피에르 르 샹트로는 “옛날 도시에 는 이자 대부라는 직업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이자 대부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날에는 이자 대부업자들이 없는 곳이 없으며 이들은 공 개적으로 악덕을 저지르고 있다”면서 변화된 세태 즉 이자 대부가 일상화 된 세태를 개탄했다.36) 이자 대부가 일상화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칠죄종 중 하나인 탐욕이 이 시기에 가장 큰 중죄로 부상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전 시기까지 가장 큰 죄악은 탐욕이 아니라 교만이었지만 12~3세기에는 탐욕이 교만을 제치고 최고의 죄로 올라섰다. 상업과 교역의 증가로 이윤을 얻을 기회가 늘면서 자연히 이윤 추구 욕심도 증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3세기 중반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수사 에티엔 드 부르봉(1190년 경~1261년)은 탐욕의 한 형태로 이자 대부를 제시하고 있다.37) 이자 대부가 일반화되면서 이와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 일상의 중요한 현 안으로 부상함에 따라 교회와 세속 군주들은 이자 대부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38) 하지만 교회의 태도 변화를 가져온 요인이 사 회경제적 변화 뿐만은 아니었다. 11세기 이후 교회가 이자 대부에 적극적 인 공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교황권의 성장 덕분이었다. 이전까지 교황 은 고위 성직자의 임명과 같은 종교적인 문제에서도 황제에 밀려 주도권을 36) J.W. Baldwin, Masters, princes and merchants: the social views of Peter the Chanter and his circle(Princeton, 1970), vol.1, p.298. 37) 그는 최초의 종교 재판관 중의 한 명이기도 했다. 그의 예화집 『설교 자료집』에는 3천 편에 달하는 예화가 실려 있다. Etienne de Bourbon, Anecdotes historiques, légendes et apologues tirés du recueil inédit d'Etienne de Bourbon(Paris, 1877), pp. 361-369. 38) 남종국, 「12세기 교회법학자」, 2쪽.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17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자 대부와 같은 경제적 문제에까지 개입할 여력 은 더욱 없었다. 하지만 11세기 중엽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기독교인들 의 일상적인 삶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교회법과 행정 제도를 일신하면서 성직자뿐만 아니라 일반 기독교인들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여 러 문제들에 대해 교회 재판권을 주장했다.39) 12세기 이후 교회가 이자 대부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이를 억제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종교회의의 결정에서 잘 드러난다. 교회가 이자 대부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기 시작한 것은 1139년 2차 라테 라노 종교회의에서였다. “우리들 또한, 신법과 민법 그리고 구약과 신약이 비난했던 이자 대부업자들의 혐오스럽고 수치스러우며 만족할 줄 모르는 저 탐욕스러움을 단죄한다. 이자 대부업자들에게 모든 종교적 평안을 박 탈할 것이며 어떤 대주교나 주교 또는 수도원장이나 성직에 종사하는 사 람들도 이들을 교회에 들이지 말 것을 명한다. 이자 대부업자들이 평생 치 욕스러운 오명을 안고 살게 할 것이며 만약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 회에 묻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포했다.40) 이자 대부를 단죄하겠다는 2차 라테라노 종교회의의 의지는 확고하고 타협의 여지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자 대부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겠다는 의지는 규제 대상의 확대에서도 확인된다. 중세 초기에는 주로 이자 대부를 하는 성직자를 단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12세기 이후에 는 속인들도 처벌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41) 1179년 3차 라테라노 종교회의에서는 이자 대부의 죄가 사회 거의 모든 곳에 만연해 이자 대부를 금하는 성서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는 많은 사람 들이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이자 대부에 뛰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자 대 39) Ibid. 2쪽. 40) 다음 책에는 종교회의 법령의 라틴어 원문과 영어 번역문이 함께 실려 있다.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pp.203-204, 547. 41) 4세기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이자 대부를 한 성직자는 성직을 박탈할 것을 명했 다. Baldwin, Masters, vol.1, p.296; Moore, “Pope Innocent III,” p.70. 18 서양사연구 제52집 부를 합법적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당시의 세태를 개탄하고 있다.42) 그러나 원론적인 차원에서 교회는 이자 대부라는 죄악을 근절해야 한다고 생각했 지만 현실에서 모든 이자 대부업자를 단죄하는 것에는 서로 의견을 달리했 다. 신학자들은 강경하게 모든 이자 대부를 금지할 것을 촉구했던 반면 고 위 성직자들은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만을 단죄할 것을 요구했다. 최종적으 로 고위 성직자들의 입장이 반영되어 모든 이자 대부업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봐도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만을 규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Usurarii manifesti)는 미사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고, 죽어서는 교회 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또한 명백한 이자 대부업 자로부터 무언가를 받고서 그를 교회의 묘지에 묻히게 해준 성직자는 성무 를 수행할 수 없도록 했다.43) 1215년 개최된 4차 라테라노 종교회의에서는 이자 대부를 단죄하려는 의지가 더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44) 왜냐하면 그간의 노력으로 기독교인 이 자 대부업자가 줄어들어 이제 모든 이자 대부가 아니라 무거운 이자만을 선별적으로 처벌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난과 공세가 유대인 이자 대부업자에게 집중되었다. 교회가 기독교인들의 이자 대부를 금하면 금할 수록 유대인 이자 대부업자의 농간으로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피해를 보게 되었고, 짧은 시간 안에 유대인 이자 대부업자들이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고갈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져 나왔다. 논의의 결과 4차 라테라노 종교 회의에서도 모든 이자 대부가 아니라 지나치게 높은 이자를 수취하는 대부 를 단죄하기로 합의했다. 즉 종교회의는 만약 유대인이 기독교인들에게 무 겁고 과도한 이자(graves et immoderatas usuras)를 받았다면 부당하게 수 취한 지나친 이자를 기독교 채무자에게 되돌려줄 때까지 기독교 공동체로 부터 추방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 이자 대부업자와 42)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p.233. 43)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p.233, 558. 44) Moore, “Pope Innocent III,” pp.70-71.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19 의 모든 거래를 중단하고, 세속 제후들은 유대인들이 지나친 이자(a tanto gravimine)를 받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공포했다. 얼핏 보기에 4차 라테 라노 종교회의의 결정이 유대인 이자 대부업자를 처벌하겠다는 것처럼 보 이지만 실제로는 유대인에게 무겁고 과도하지 않은 정도의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45) 이자 대부를 바라보는 4차 라테라노 종교회의의 공식 입장은 이를 주 도했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교황으로 임명된 첫 해 인노켄티우스 3세는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자 대 부를 금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언급하면서 이자 대부업자들이 법망을 교묘 히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노켄티우스 3세가 단 죄하려고 했던 것은 모든 이자 대부업자가 아니라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 였다. 이후에도 교황은 선별적인 처벌 정책을 유지했다. 1199년 12월 교 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십자군 원정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서유럽 전역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2.5%의 소득세를 낼 것을 명했다. 하지만 소득세를 납 부하기 전에 이자로 지불해야 할 돈을 사전에 미리 공제할 수 있도록 허락 했다(prius tamen deductis usuris quarum solution vitari non possit). 이 는 교황 스스로가 이자 대부 행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1208년 교황은 프 랑스 고위 성직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기독교인이 십자군 원정에 참가해 있는 동안에는 이자 지불을 면제해주라는 명을 내렸다. 다시 말하면 십자 군 원정에 참여하지 않은 채무자는 이자를 갚아야 했고, 십자군 원정에 참 가한 사람이라도 원정에서 돌아온 후에는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위의 사 례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노켄티우스 3세와 고위 성직자들은 사회적 으로 일반화된 이자 대부를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과도하고 부당한 이자를 받는 소규모 대부업자만을 선별적으로 처벌하려고 했던 것이다.46) 45)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p.583. 46) Moore, “Pope Innocent III,” pp.63-64, 66-71. 20 서양사연구 제52집 모든 이자 대부업자가 아니라 명백하고 악명 높은 이자 대부업자만을 선별적으로 처벌하겠다는 기조는 1274년 리옹 종교회의에서도 나타난다.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usurarii manifesti)”가 유언장에 불법적으로 수취한 이자를 되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했더라도 실제로 부당하게 얻은 이자를 환원할 때까지는 기독교 묘지에 묻히는 것을 금했다. 이러한 명령을 어기 고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를 교회에 묻는 것을 허용한 성직자는 성무를 수 행할 수 없었다. 또한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가 부당하게 수취한 이자를 모두 되돌려 줄때가지 누구도 그들의 증인으로 나서서는 안 되고, 어떤 성 직자도 그들의 고해를 듣거나 그들에게 사면을 내릴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리옹 종교회의에서는 이자 대부의 기회가 줄어들수록 이자 대부라 는 악행을 근절하기가 수월해진다고 판단하고 공개적으로 이자 대부를 행 하는(publice pecuniam foenebrem exercentes) 이방인들에게 사무실을 임 대하거나 거주를 허용하지 못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 공동체는 3개월 안에 자신의 영토에서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usurarios manifestos) 를 추방해야 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를 추방하지 않 을 경우 추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성무 금지령을 감수해야 했다. 3달이 지 난 후에도 이를 실행하지 않은 도시, 군주나 개인들은 신분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했다. 대주교나 주교와 같은 성직자들은 성무 금지의 벌을,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파문을, 종교 단체와 조직은 성사 금지의 벌을, 속인이나 단체는 소속 교구의 장으로부터 벌을 받아야 했다.47) 그렇다면 12~3세기 종교회의에서 단죄하고자 했던 명백한 이자 대부업 자나 공개적으로 이자 대부를 하는 사람은 누구였는가? 당시에도 이를 둘 러싼 견해 차이가 존재했다. 13세기 말 프랑스 출신의 교회법학자 기욤 뒤 랑(Guillaume Durand)은 1274년 리옹 종교회의에서 단죄하고자 했던 명 백한 이자 대부업자는 공개적으로 영업을 하는 이방인 출신의 이자 대부 업자이며, 토박이 출신 이자 대부업자는 공개적으로 영업을 하더라도 명 47)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pp.355-356, 605-606.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21 백한 이자 대부업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잉글랜드에 서는 피렌체와 시에나 출신의 이자 대부업자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롬바르 드 인이라 불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대부업자들이 명백한 대부업자들인 것 이다.48) 1309년 나폴리 왕국은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를 판명하는 법적 절 차를 확립했다. 이 절차에 따르면 4명의 정직한 증인들이 고발당한 사람 을 이자 대부업자로 간주하면 명백한 이자대부업자가 되는 것이었다. 확 정 선고를 받은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는 부당하게 받은 모든 이자를 돌려 주고 이자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무거운 벌금도 물어야 했다.49) 1339년 아 퀼레이아 교구의 규정에 따르면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는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극악한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경우였다(Manifestum autem usurarium eum declaramus de cujus crimine constat per notorium facti scelus, per rei evidentiam).50) 구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 개적으로 영업을 하거나, 자신이 이자 대부업자라고 고해를 하거나 법정에 서 선고를 받거나 또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증인 앞에서 인 정하는 경우가 바로 명백한 이자 대부였다. 하지만 다른 구체적인 증거나 고백이 없어도 다수의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자 대부를 하면 명백한 이자 대부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기준들을 고 려할 때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로 간주될 수 있었던 사람은 공개적으로 좌 판을 벌리고 저당물을 잡고 높은 이자를 받으며 적은 돈을 빌려주는 전당 포 업자 등과 같은 작은 규모의 이자 대부업자들이었다. 반면 비공개적으 로 제후나 고위 성직자들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주고 상대적으로 낮은 이자 를 받았던 국제적인 수준의 은행가나 상인들은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라 48) B.N. Nelson, “he usurer and the merchant prince: italian businessmen and the ecclesiastical law of restitution, 1150~1550”, Journal of Economic History, no. 7(1947), p.107. 49) Shatzmiller, Shylock reconsidered, p.23. 50) A. Derbes and M. Sandona, he usurer’s heart: Giotto, Enrico Scrovegni and the Arena Chapel in Padua(Pennsylvania, 2008), pp.38-39, 173. 22 서양사연구 제52집 는 범주에서 제외되어 있었다.51)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종교회의의 결정이 지역의 작은 교구 차원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을까? 중세 후반 잉글랜드 교회 법정에서 이루어진 이자 대부업자에 대한 재판기록은 이에 대한 잠정적인 해답을 제 공한다. 잉글랜드의 모든 교구는 매년 3번 내지 4번 교회에서 이자 대부업 자의 명단을 공개하고 그들을 교구에서 추방해야 했다. 주교는 개별 교구 를 방문해 이자 대부 행위를 색출하고 이를 바로 잡아야 했다. 실제로 이 자 대부를 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사람들은 대개 공개적(public)으로 이 자 대부를 하거나 명백한(manifest) 이자 대부업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이 자 대부를 한 모든 사람이 이자 대부업자로 고발당해 교회 재판을 받은 것 은 아니었다. 또한 큰 액수의 이자 대부가 고발당한 경우도 드물었으며 주 로 높은 이자를 받는 대부들이 이자 대부로 선고되어 처벌 받았다. 종합하 면 작은 교구 단위에서는 공개적으로 이자 대부를 하면서 높은 이자를 받 고 소규모로 돈을 빌려주는 이자 대부업자들이 고발을 당해 재판을 받았 던 것이다.52) 12~3세기 종교회의의 결정처럼 작은 교구 단위에서도 모든 이자 대부를 처벌한 것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와 높은 이자를 수취하는 대부를 주로 단죄하고 처벌했다. 그런 점에서 교회법은 원론적으로 모든 이자 대부업자를 불법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근절해야 할 악으로 규정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현장에서는 공개적으로 이자 대부를 하면서 높은 이자를 받았던 소규모의 이자 대부업자를 주로 처벌했다. 하 이드(J.K. Hyde)는 교회 법정이 대규모 이자 대부업자에게 큰 위협을 주지 못했고 새끼 물고기들만이 교회의 그물에 걸려들었다고 말한다.53) 이러한 51) 넬슨은 전당포 주인과 같은 이자 대부업자와 국제적인 거상(merchant prince) 사이의 차이와 구분은 명확했으며, 이들 거상은 이자 대부업자라는 오명과 교회 와 세속 권력의 처벌로부터 면제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Nelson, “he usurer,” pp.107, 121. 52) Helmolz, “Usury,” pp.366-374. 53) J.K. Hyde, Padua in the age of Dante: a social history of an Italian city state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23 상황은 usury라는 용어의 형식적인 뜻과 실질적인 내용에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2. 이자 대부에 대한 세속 권력의 공격 교회와 마찬가지로 세속 군주들도 이자 대부에 대한 공세에 동참했다. 이자 대부가 일반화되면서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를 야기하자 세속의 군주 들도 이자 대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고 이를 제한하기 위한 구 체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세속 군주들이 이자 대부를 단죄하는 일에 동참 한 이유가 교회의 압박 때문인지 아니면 상호 이해관계가 일치해서인지 확 실하지 않다.54) 분명한 것은 세속 권력이 이자 대부를 규제한 것은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서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재정적 이유로 이 자 대부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12세기 후반 프랑스 왕실과 지방 제후들은 이자 대부를 처벌하기보다는 유대인과 이탈리아 출신의 이자 대부업자를 허용했다. 이렇게 허가를 받 은 이자 대부업자들은 연이율 43%의 높은 이자를 받기도 했다. 이자 대부 를 허용한 이유는 상업 활동을 활성화시켜 재정 수입을 확충하고자 함이 었다. 하지만 교회법이 금하고 사회적 악으로 간주되는 이자 대부라는 행 위는 언제나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에 세속 권력들은 필요에 따 라 이러한 권리를 활용했다. 실제로 13~4세기 프랑스 왕실은 반복적으로 유대인과 이탈리아 이자 대부업자를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했다.55) 그런 점 에서 볼 때 이자 대부에 대한 세속 군주들의 대응은 일관되지 않았으며 때 론 정치적 재정적 고려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 었다. (Modena, 2005), p.189; Derbes and Sandona, he usurer’s heart, p.36. 54) Munro, “he medieval origins,” pp.506-507. 55) Armstrong, “Usury,” p.1781. 24 서양사연구 제52집 프랑스와 잉글랜드 왕실은 이자 대부라는 악을 자신들의 왕국에서 완전 히 근절하기보다는 외국 이자 대부업자 특히 이탈리아 출신의 이자 대부업 자와 유대인 대부업자를 규제하고 길들이는데 주력했다. 프랑스와 잉글랜 드에서 이자 대부업자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용어 중의 하나가 롬바르드인 들(Lombardi)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롬바르드 상인들이 라는 용어는 북 중부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자 대부를 주로 하는 상인들을 뜻하는 경멸적인 어휘였다. 또한 이 말은 이자 대부업자 이외에도 수전노, 탐욕스러운 인간, 악마, 이단, 배신자 등의 뜻도 내포하고 있었다. 한마디 로 끔찍하게 욕심 많은 이탈리아 출신의 이방인 이자 대부업자를 지칭하는 저주의 단어였다. 실제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실은 이자 대부를 한다는 이유로 롬바르드인들을 추방하는 명령을 종종 내렸다.56) 필리프 2세는 이자 대부에 대해 일관된 정책을 유지하지 않았으며 단죄 할 경우에도 주로 유대인 이자 대부업자가 그 대상이었다. 그는 1182년 왕 국 내에서 이자 대부를 한 유대인을 추방하는 명령을 내렸다가 1198년에 는 이들을 다시 허용했다. 1206년에는 유대인이 연이율 43% 정도의 지나 치게 높은 이자를 받은 것을 금지했다. 즉 합리적인 수준의 이자 수취는 56) 다른 두 개의 용어는 카오르 인들과 유대인들이었다. 롬바르드인들과 유대인들 이외에도 카오르인들도 서유럽에서 이자 대부업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 다. 하지만 이자 대부업자 카오르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디 출신인지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오해가 있었다. 13세기 중엽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매튜 패리스는 카오 르인들이 이탈리아 출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세기 후 피렌체 출신의 작 가 보카치오는 카오르인들이 프랑스 남부 지방 출신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 자 대부업자를 추방한다는 법령에는 롬바르드인들과 카오르인들이 동시에 언급 되는 경우가 많았다. 1289년 나폴리 왕 샤를 2세는 자신의 왕국 내에서 공개적 으로 이자 대부를 하는 모든 롬바르드인들, 카오르인들 그리고 다른 외국인들 (omnes Lombardos, Caturcinos, aliasque personas alienigenas usuras publice exercentes)을 추방할 것을 명했다. J. Labrot, Affairistes et usuriers au Moyen Age. Tome 1: Les Lombards, l’hérésie et l’Eglise(Cahors, 2008), pp.11-36; Dante Alighieri, he divine comedy, translated, with commentary, by C.S. Singleton (Princeton, 1970), vol.1, part 2, p.172.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25 허용했다는 것이다.57) 1211년에는 자신의 제후들에게 이자 대부를 용납하 지 말라는 명을 내렸고, 더 나아가 이자 대부업자의 부동산을 왕실에 귀속 시키겠다는 원칙을 천명했다.58) 1219년에는 이자 상한을 정함으로써 유대 인의 이자 대부로 인한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특히 유대인 이자 대부 업자가 상속 재산이 없어 자신의 노동으로만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 게는 이자 대부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수도원장이나 상위 성직자의 허락 없이 수도사와 성직자들에게 대부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59) 전체적으 로 필리프 2세의 정책은 지나치게 높은 이자를 요구하는 유대인 대부업자 를 규제하는 것이었다. 십자군에 대한 종교적 열정과 도덕적 개혁을 주창했던 프랑스 왕 루이 9 세(1226~1270)는 예상할 수 있듯이 이자 대부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유지 했다. 그는 이자 대부를 악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왕국에서 이 악을 제거하 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그의 통치 시기 유대인들과 이자 대부업자들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추방과 탄압을 경험해야 했다.60) 1230 년 루이 9세는 자신뿐만 아니라 제후들도 각자의 영토에서 유대인들의 이 자 대부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 이자 대부업자들에게 이자를 지불하지 말 것을 명령받았다. 하지만 이를 어긴 사람들에게 어떤 처벌을 부과할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1235년에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자 대부가 아니라 스스로 노동 57) R. Chazan, Church, state, and Jew in the Middle Ages(Behrman House, 1979), pp.205-206. 58) Ibanès, La doctrine de l’église, pp.89-91. 59) Chazan, Church, p.209; S. Lipton, Images of intolerance: the representation of Jews and Judaism in the Bible moralisé(London, 1999), p.48. 60) A.S. Abulaia, Christian Jewish relations 1000-1300: Jews in the service(New York, 2011); R. Chazan, “Anti usury eforts in hirteenth century Narbonne and the jewish response,” Proceedings of the American Academy for Jewish Research, vol.41/42(1973~1974), p.45. 26 서양사연구 제52집 하거나 장사해서 생계를 유지하라고 명령했다.61) 루이 9세는 1253년 첫 십 자군 원정 중에도 자신의 왕국 내에서 이자 대부를 계속하는 모든 유대인 들을 추방할 것을 명할 정도로 이자 대부 단죄에 적극적이었다. 루이 9세는 유대인 이자 대부업자에 대한 공세를 이탈리아 출신 이자 대 부업자들에게까지 확대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이자 대부업자에 대한 공세 는 전적으로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이 자신의 왕국에서 이자 대부로 많은 돈을 벌어가고 왕 자신 또한 이탈리아 대부업자에게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을 바로잡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루이 9세는 1253년 이탈리아 상인들로부터 10만 리브르에 해당하는 막대 한 돈을 빌렸다. 그리고 1256년 백 오십 명의 아스티 상인들의 재산을 몰 수함으로써 이탈리아 이자 대부업자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물 론 루이 9세가 이러한 강압적인 조취를 취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아스티 시 가 자신의 숙부를 감금한데 대한 보복조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스티 출신의 상인들이 이자 대부와 은행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스티 상인들은 1226년부터 프랑스 왕국에서 이자 대부를 시작했 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었다.62) 1269년에는 자신의 왕국을 가난 하게 만드는 북부 이탈리아와 카오르 출신의 이자 대부업자들과 기타 대 부업자들을 추방할 것을 명했다. 왕의 포고령에 따르면 이들 이자 대부업 자들은 3개월 안에 프랑스 영토를 떠나야 했다. 이 포고령의 영향으로 같 은 해 10월 상스(Sens)에서 열린 지역 종교회의에서도 비슷한 조취를 결의 했다. 또한 이자 대부업자를 추방하라는 프랑스 왕의 포고령은 1274년 리 옹 종교회의에도 영향을 주어, 이자 대부업자를 추방하도록 만들었다.63) 61) M.C. Mansield, he humiliation of sinners: public penance in thirteenth century France(New York, 1995), p.278. 62) R.W. Dorin, “L’expulsion des usuriers hors de la France à la fin du XIIIe siècle,” Hypothèses: travaux de l’Ecole Doctorale d’Histoire de l’Université Paris I Panthéon-Sorbonne, no.17(2014), p.155. 63) Dorin, “L’expulsion,” p.155.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27 필리프 4세(1285~1314)는 통치 초기에 반복적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이 자 대부업자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이들을 규제하는 법령을 실시하면서 루이 9세와 유사한 정책을 이어갔다. 1291년에는 이자 대부를 했다는 구 실로 모든 이탈리아 상인과 대부업자를 체포할 것을 명했다. 이들이 물어 야 하는 벌금이 22만 천 리브르 투르누아에 달할 정도로 이자 대부의 규모 는 대단했다. 1306년에는 이자 대부업자의 대명사인 유대인을 추방했고 그 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필리프 4세는 통치 후반기 이자 대부에 대 한 관용적인 정책으로 전환했다. 1311년 연이율 20% 미만의 이자를 받는 대부업자들에 대한 처벌을 폐지함으로써 사실상 이자를 합법화 시켰다. 이 후 프랑스 왕실은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높지 않은 이자를 용인하는 방향 으로 나갔다. 샤를 5세는 왕국 내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대부업자들이 연이 율 16%를 넘지 않는 선에서 이자 대부를 하는 것을 허용했다. 1394년 샤 를 6세가 이전에 유대인 이자 대부업자들에게 허용했던 특혜를 폐지하면서 이탈리아 상인들이 프랑스 왕실의 허가를 받은 공식적인 이자 대부를 독점 하게 되었다.64) 이자 대부를 바라보는 잉글랜드 왕실의 입장 또한 프랑스 왕실의 입장 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국 내에서 사악한 범죄이자 중대한 죄악인 이자 대부를 근절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잉글랜드 왕실은 주로 외국 출신의 이자 대부업자 특히 유대인과 이탈리아 출신의 이자 대부업자 를 규제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프랑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세 잉글 랜드에서도 일반적으로 이자 대부업자는 유대인이나 롬바르디아, 즉 이탈 리아 출신의 상인들을 의미했고 이들에 대한 잉글랜드 사람들의 적대감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교회는 기독교인의 이자 대부는 금했지만 유대인들에 게는 이를 허용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를 이용해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이자 대부로 돈을 버는 유대인들은 잉글랜드인들의 반감을 샀 고 이러한 반감은 자주 왕실이 유대인을 단죄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었 64) Armstrong, “Usury,” p.1781. 28 서양사연구 제52집 다. 왕실의 공세가 유대인과 이탈리아 출신 이자 대부업자에게 맞춰져 있 었지만 그렇다고 잉글랜드 출신의 기독교 이자 대부업자에 대한 규제와 처 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례로 1163년 헨리 2세는 기독교인들의 이자 대부 행위를 없애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65) 그러나 외국 출신 이자 대부업자에 대한 왕실의 입장이 항상 일관된 것 은 아니었다. 리처드 1세는 유대인 대부업자가 이자를 수취하는 행위를 암 묵적으로 인정했고, 헨리 3세(1207~1272, 재위 1216~1272)는 추방과 허 용이라는 상반된 정책을 번갈아 사용했다. 1233년 헨리 3세는 유대인들이 일련의 이자를 받는 것을 허용했으며 특히 옥스퍼드 거주 유대인들이 옥 스퍼드 대학의 학자들로부터 일정 정도의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 을 용인했다. 유대인 이자 대부업자를 왕국에서 모두 추방하지 않고 이들 이 지나치지 않은 정도의 이자를 수취하는 것을 용인한 헨리 3세의 정책은 1215년 4차 라테라노 종교회의의 결정을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1215년 라테라노 종교회의에서는 무겁고 과도한 이자를 받는 유대인만을 선별적으로 처벌하기로 했기 때문이다.66) 1240년 헨리 3세는 왕국 내에서 이자 대부를 하는 모든 외국 상인들에 게 한 달 내로 왕국을 떠날 것을 명령하면서 강경 정책으로 선회하는 것처 럼 보였다. 하지만 추방 명령을 내리는 것과 이를 엄격히 시행하는 것이 항 상 일치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헨리 3세는 이후 일부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는 왕국 내에서 머물며 장사하는 것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상 인들이 이전에 대부했던 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조처했다. 물론 이탈 리아 상인들이 더 이상 왕국 내에서 이자 대부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서였다. 이러한 추방령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자 대부업자의 돈과 재산을 65) 1275년 사망한 기독교 이자 대부업자인 밀로에 대한 사법 조사가 시행되었다. 하 지만 잉글랜드 내부의 기독교 이자 대부업자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 이다. Gwen Seabourne, Royal regulation of loans and sales in medieval England (Woodbridge: he Boydell Press, 2003), p.25, 28-29. 66) Seabourne, Royal regulation, p.31.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29 몰수하기도 했으며 때론 추방을 면해주는 ‘후의’에 대한 대가를 받기도 했 다. 또한 유죄 선고를 받은 이자 대부업자가 사망하면 그의 모든 재산이 왕에게 귀속되었기 때문에 왕실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나쁠 것이 없었다. 이 런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헨리 3세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의 왕국 내에 서 이자 대부를 완전히 척결하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외국 상인들을 길들 이고 이를 통해 재정적인 이익을 얻는 것이었다.67) 에드워드 1세 또한 부왕인 헨리 3세와 유사한 정책을 시행했다. 즉위한 2년 후인 1274년 에드워드 1세(재위 1272~1307)는 런던 시장에게 11월 9 일부터 시작해 20일 안에 모든 이자 대부업자를 왕국 밖으로 추방할 것을, 이를 어기는 자는 인신과 재산을 몰수할 것을 명했다. 1274년 리옹 종교회 의에서도 외국 출신의 이자 대부업자를 추방할 것을 결정한 바 있었다. 왕 명을 이행하는 과정에 많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이자 대부업자로 유죄 판결 을 받았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도 부왕인 헨리 3세처럼 실제로 이자 대부 를 하는 외국 상인을 모두 추방하지는 않았고, 피렌체, 시에나, 피스토이 아 출신의 대부업자들에게 사면권을 부여하고 잉글랜드에 머물 수 있도록 허용했다. 부왕 시대와 마찬가지로 향후 이자 대부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였다.68) 1290년 에드워드 1세는 이자 대부를 했다는 이유로 유대인 들을 추방할 것을 명했는데 이 또한 왕국에서 '더러운 유대인 이자 대부업 자'를 제거하겠다는 종교적 열정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들을 추방한 다는 명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유대인과 경쟁 관계에 있었던 왕국 내의 기독교 상인들과 이자 대부업자들의 압력 때문이었다.69) 67) Seabourne, Royal regulation, p.42; Mavis Mate, “The indebtedness of Canterbury cathedral priory 1215~95,” The Economic History Review, vol.26 (1973), p.185. 68) Seabourne, Royal regulation, p.41. 69) Seabourne, Royal regulation, p.41, 65; R.W. Dorin, “Canon law and the problem of expulsion: the origins and interpretations of Usurarum voraginem (VI 5.5.1),” Zeitschrift Der Savigny-Stiftung Für Rechtsgeschichte, 99(2013), pp.131-133. 30 서양사연구 제52집 13세기 말과 14세기 초반 잉글랜드 왕실은 자주 유대인과 이탈리아 출 신의 이자 대부업자를 추방할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했지만 실제로는 추방 이 아니라 벌금형을 부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자 대부로 유죄 판결 을 받은 이들은 일정 정도의 벌금을 감수하고 계속해서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왕실은 재정 수입을 얻고 필요할 경우 추방이라는 무기를 사용 해 이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70) 게다가 왕실은 백성들의 원성과 비난의 대 상인 이들 외국 출신 이자 대부업자를 벌함으로써 여론의 지지도 확보할 수 있었다. 실제로 본국의 기독교 상인들은 이들 외국 출신의 상인과 이자 대부업자를 쫓아내라고 왕실에 요구하곤 했다. 1376년 의회의 요구는 이 를 잘 보여준다. 당시 의회는 이탈리아 출신의 대부업자들에 대한 런던 상 인들의 오래된 불만을 소개하면서 이자 대부만을 하는 모든 롬바르디아 출신의 상인들을 가능한 빨리 이 땅에서 쫓아낼 것을 왕실에 요구했다. 의 회는 이들을 엄한 벌로 다스려 추방하지 않는다면 왕국은 얼마 지나지 않 아 파멸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 이탈리아 이자 대부업자들은 형언할 수 없는 악행만을 저지르고 왕국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에는 유대인과 사라센 그리고 밀정도 숨어있기 때문이라며 추방을 촉구했다.71) 3. 대중 설교: 지옥의 공포를 심어주다 12~3세기 이자 대부를 단죄하는데 있어 가장 강경한 목소리를 낸 것은 주로 신학자 출신의 설교가들이었다. 이들이 일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는 이자 대부를 죄악시하는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을 현장에서 가 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수도사와 신학자들은 도시를 다니면 70) Seabourne, Royal regulation, p.44. 71) Gilchrist, The church, p.72; Seabourne, Royal regulation, p.65; Jonathan Goldberg, ed., Reclaiming Sodom(New York, 1994), p.46.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31 서 이자 대부 척결 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설교에서 직접적이고 선동적 인 언어를 사용해 이자 대부업자가 겪게 될 지옥의 고통을 실감나게 전달 했다. 하지만 신학자와 교회법학자들 중에서도 이자 대부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 은 이자를 받는 모든 대부 행위를 동일하게 보지 않았으며 지나치지 않은 정도의 이자를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2~14세기에 이자 대부 자체를 원론적으로 옹호하는 신학자는 매우 드물었다.72) 이자 대부 척결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집단은 피에르 르 샹트르 (Pierre Le Chantre: ~1197)와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12세기 후반 과 13세기 초반 프랑스와 플랑드르 지방을 돌며 이자 대부를 근절하는 운 동을 주도했다.73) 르 샹트르는 파리 신학부에서 “성경에 입각한 도덕 학 교”라 불리는 조직을 세웠다. 이 조직에는 르 샹트르의 영향을 직간접적 으로 받은 로베르 드 쿠르송(Robert de Courçon), 스티븐 랭톤(Stephen Langton), 토마스 촙햄(homas of Cobham), 풀크 드 뇌이이(Foulques de Neuilly)와 자크 드 비트리(Jacques de Vitry)와 같은 설교가 등이 참여하 고 있었다. 이들은 도시를 돌며 이자 대부를 단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 였을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설교하는 많은 수도사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이자 대부를 근절할 수 있는 여러 안내 책자를 저술했다.74) 르 샹트르는 이자 대부가 늘어나고 대부 업자들이 부자가 되는 것은 고 위 성직자들이 이들을 눈감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그 는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만을 처벌하겠다는 1179년 3차 라테라노 종교회 의의 결정이 이자 대부를 근절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명백한 이자 대부업자만을 처벌하겠다는 종교회의의 결정 이 어떻게 내려졌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이자 대부에 대한 좀 더 강 72) Moore, “Pope Innocent III,” p.59, 71. 73) 그는 랭스에서 교육을 받고 1170년 무렵 파리로 와서 활동했다. 1183년 노트르담 성당의 성가대 수석 지휘자인 칸토르(cantor)로 임명되었다. 74) Baldwin, Masters, vol.1, p.301. 32 서양사연구 제52집 경한 정책을 주문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교황 알렉산더 3세가 이자 대 부의 전염병을 파문으로 근절하자고 제안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처벌의 대 상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이 질문에 한 고위 성직자는 명백하고 악명 높은 범죄자만을 처벌해야 한다고 답했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최종적으로 파문 의 형벌은 공개적으로 이자 대부를 한다고 자백한 사람이나 막대기에 매달 린 돈주머니와 같은 이자 대부업자의 표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만 적용 되었다. 결국 르 샹트르는 전당포 업자와 같은 명백한 대부업자만을 처벌 한다는 고위 성직자들의 결정이 교회법의 효과를 반감시켜 이자 대부를 근 절시키지 못했다고 비판했다.75) 르 샹트르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현장을 다니면서 이자 대부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특히 그의 제자 풀크는 1195년 부터 1215년 사이 북프랑스 지역을 돌며 이자 대부를 근절할 것을 호소하 고 다녔다. 설교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 그는 여러 주교들로부터 설교 요 청을 받고 교회나 공공장소에서 뿐만 아니라 마상 시합장 등 어떤 장소도 가리지 않고 설교를 다녔다. 이러한 설교 능력 덕분에 나중에 교황 인노켄 티우스 3세로부터 십자군을 독려하는 설교 임무를 의뢰받기도 했다. 연대 기 작가들에 따르면 풀크는 주로 두 가지 부류의 죄인들 즉 창녀와 이자 대부업자를 대상으로 설교를 했으며 그들에게 죄악의 삶을 버리고 회개하 라고 권고했다. 풀크의 설교를 들은 이자 대부업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 우치고 이자 대부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76) 잉글랜드 출신으로 파리 대학의 총장을 지낸 로베르 드 쿠르송(Robert 75) Baldwin, Masters, vol.1, pp.300-301. 76) 풀크가 이자 대부를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연대기 작가 도 세르(Robert d’Auxerre)의 기록에 잘 나와 있다. 도세르가 묘사한 풀크는 이자 대 부라는 죄를 완전히 근절하고 덕을 육성하자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자 대부업자 를 끔찍하게도 혐오했으며 무한하고 무거운 이자로 기독교인들을 괴롭히는 유 대인 이자 대부업자를 증오했다. Leonard B. Glick, Abraham's heirs: Jews and Christians in medieval Europe(New York, 1999), pp.159-160.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33 de Courçon)은 이자 대부를 척결하는 운동을 주도하면서 당시 “이자 대부 의 적”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그는 모든 형태의 이자 대부를 반대하고 근절해야 한다고 역설했다.77) 1215년 파리 종교회의에서 이자 대부를 이 단 죄로 간주해 이자 대부업자를 엄격하게 처벌할 것을 강조했다. 특히 고 위 성직자들과 제후들이 이자 대부업자를 불러들이고 심지어 보호까지 한 다는 점을 비난했다.78) 그는 자신의 저서 『이자 대부에 관하여(De Usura)』 에서 이자 대부업자의 돈으로 교회를 세웠을 경우에는 우선 교황이 주도하 는 종교회의를 소집해서 모든 기독교인이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정신과 육 체노동을 통해 양식을 벌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파문과 저주를 받아 야 한다고 주장했다. 쿠르송은 이렇게 한다면 반역자이자 약탈자인 모든 이자 대부업자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79) 그는 파리 사람들에게 이자 대부의 죄악을 버리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고, 만약 이자 대부를 그만 두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명단을 교회 당국에 고발 할 것이며 세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자 대부를 하는 사람은 파 문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교황의 특사로 1213년에서 1215년까지 아라스, 생토메르, 플 랑드르 지방 등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이자 대부를 근절해야 한 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쿠르송과 생각을 공유했던 사람들은 특히 아라 스를 이자 대부라는 진딧물로 가득한 곳으로 간주하고 이 해충을 박멸하 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아라스는 북유럽에서 은행업 중심지였기에 이자 대부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아라스 (Arras)의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라스에는 이자 대부업자가 너무나 많 77) Moore, “Pope Innocent III,” p.60; Andrew Cowell, At play in the tavern: signs, coins, and bodies in the Middle Ages(Michigan, 1999), p.64. 78) G. Lefèvre, ed., “Le traité ‘De usura’ de Robert de Courçon,” Travaux et mémoires de l'université de Lille, tome X, no.30(1902), pp.58-59; Wood, Medieval economic thought p.163; Baldwin, Masters, vol.1, p.297. 79) Lefèvre, “Le traité,” pp.34-35. 34 서양사연구 제52집 아서 이자 대부를 규제하자는 종교회의의 결정이 적용된다면 모든 아라스 시민은 벌을 받게 되고 그 결과 모든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의 말처럼 아라스에는 그만큼 이자 대부가 성행했었다.80) 게다가 그는 최근에 사망해 교회 묘지에 묻힌 이자 대부업자의 시신을 파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명했다. 하지만 이자 대부를 척결하겠다는 지 나치게 강경한 그의 태도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심기를 건드렸고, 필 리프 2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쿠르송의 임무가 십자군을 준비하 는 것이지 이자 대부 척결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에 교황은 쿠르송의 지 나친 태도를 꾸짖고 프랑스의 ‘정직한 관습과 이성적인 관행’을 존중하도 록 할 것을 약속하면서도 이자 대부가 십자군 준비를 방해하기 때문에 이 자 대부를 근절하는 것은 정당한 임무라고 답했다.81) 13세기에는 프란체스코와 도미니쿠스 교단 소속 수도사들이 이자 대부 에 대한 투쟁을 주도했다.82) 특히 청빈과 가난을 이상으로 여기는 프란체 스코 교단은 이자 대부를 가난의 적으로 간주하고 이자 대부업자에 대한 설교 공세를 강화했다. 이들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이자 대부업자가 겪게 될 끔찍한 운명에 대해 선정적인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들려주었다.83) 이들 은 이자 대부업자를 가장 나쁜 악을 저지르는 자, 가장 나쁜 직업, 가장 나 쁜 죄악, 가장 나쁜 악덕과 연결 지었다. 그리고 이자 대부업자들은 불명예 스러운 죽음, 교회 묘지에 매장 불가, 지옥의 형벌 등을 겪게 될 것이라고 80) Cowell, At play, p.63. 81) Moore, “Pope Innocent III,” p.73; Wood, Medieval economic thought, p.163; Baldwin, Masters, vol.1, p.297. 82) 하지만 모든 수사들이 이자 대부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13세 기 말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였던 피에르 장 올리비(Pierre Jean Olivi) 는 단순한 이자 대부와 투자를 목적으로 한 이자 대부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 장했다. O. Bazzichi, Dall’usura al giusto profitto: l’etica economica della scuola francescana(Torino, 2008), pp.60-61. 83) S.E. Myers and S.J. MacMichael, eds., he friars and Jews in the Middle and Renaissance(Leiden, 2004), p.xi.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35 대중들에게 설파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종교회의의 결정이나 지식인들의 현학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보다 자극적이고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대중 설교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 프란체스코 수도사는 15세기 초 시에나 출신의 베르나르디노(Bernardino)였다. 그는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돌며 이자 대부 척결을 부르짖었다.84) 1425년 8월 아 시시에 도착한 그는 많은 대중들 앞에서 이자 대부는 기독교 사회에서 가 장 무거운 죄악 중의 하나이고 부패와 타락의 원천이라고 목소리를 높였 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설교에 감동한 여러 도시의 지도자들은 유 대인 이자 대부업자를 혹독하게 벌하고 기독교 공동체에서 추방했다.85) 신학자와 대중적인 설교를 하는 수도사들이 이자 대부가 심각한 악덕 이며 중대한 범죄라는 생각을 대중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활용한 방법은 예화(exemplum)였다. 이들은 성인들의 삶에서 끌어온 이 야기나 이자 대부업자가 겪게 될 끔찍한 이야기들을 모아 예화집을 편찬해 이를 현장 설교가들이 이용하도록 했다. 가장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이자 대부업자의 회개를 이끌어낸 이야기는 이자 대부업자의 비참한 죽음에 관 한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이야기를 이용한 설교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사 람은 르 샹트로 밑에서 공부하고 1193년 석사학위를 받은 자크 드 비트리 였다. 그는 자신의 설교집에서 죽기 직전에 대부업자가 겪는 공포를 실감 나게 묘사했다. 예화집에 등장하는 지옥에서 고통 받는 이자 대부업자의 모습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어떤 계약이 이 자 대부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어려운 신학 논쟁이나 고위 성직자들이 주 관하는 종교회의의 칙령보다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설교가들의 이야 기가 이자 대부업자들에게 더 직접적이고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교회의 그림이나 대중적으 84) F. Morando, The preacher’s demons: Bernardino of Siena and the social underworld of Early Renaissance Italy(Chicago, 1999), p.200. 85) A. Toaf, he Jews in Umbria(Leiden, 1993), p.xxvii. 36 서양사연구 제52집 로 널리 읽힌 문학 작품은 이자 대부업자가 겪게 될 지옥의 고통을 구체적 이고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더없이 효과적인 매체였다. 그 중에서도 단테 (1265~1321)의 『신곡』은 두드러진다.86) 이자 대부업자를 지옥의 심연에 처 넣은 단테의 비난과 저주는 시에나의 대표적인 이자 대부업자 스크로베니 가문으로 하여금 이자 대부라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예배당을 건립하게 만 들 정도로 강력했던 것이다.87) IV. 결론 중세말까지도 서유럽에서 교회법은 유저리(usury)를 원금 이상의 것을 받는 모든 이자 대부로 규정하고 있었다. 여전히 이자 대부는 신의 질서를 거스르는 죄악이며 사회적으로 근절해야할 악행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 러나 현실에서 이자 대부에 대한 교회와 세속 권력의 대응은 사회경제적 상황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본론에서는 12~4세기 교회와 세속 권력이 어떻게 이자 대부를 규제했 는지를 종교회의 법령, 왕실 법령 그리고 신학자와 교회법학자들의 저서 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 86) 단테의 묘사에 따르면 지옥의 일곱 번째 환에 있는 이자 대부업자들은 모두가 목에 주머니가 매달려 있으며 그 중 하얀 주머니에 파랗게 살찐 암퇘지의 모습을 새긴 놈 하나가 있었다. 흰 바탕에 파란 암퇘지는 파도바 출신의 이자 대부업자 스크 로베니 가문(Scrovegni)의 문장이었다. 피렌체 출신의 올트라노(Oltrarno) 가문의 우브리아키(Ubriachi), 조반니 데이 베키(Giovanni dei Becchi), 파도바의 포데스 타였던 비탈리노 델 덴체(Vitaliano del Dente) 또한 단테의 지옥에 이자 대부업자 로 나온다. J. Heers, La naisance du capitalisme au Moyen Age(Paris, 2012), p.93. 87) 많은 학자들은 단테가 스크로베니 가문을 이자 대부업자로 비난했기 때문에 엔리 코 스크로베니가 이러한 오명을 씻기 위해 예배당을 건립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예배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1302년부터였고, 단테의 신곡이 발표된 것은 1314~5 년경이었다. 이은기, 「참회인가 또 다른 사업인가: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주문자 엔리코와 화가 조토」, 9-10쪽. 12~3세기 이자 대부를 둘러싼 논쟁 37 다. 분명한 것은 12~3세기 이자 대부가 일반화되면서 여러 가지 사회 문제 가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교회와 세속의 제후들은 이런 문제들을 본격적 으로 논의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각자 나름의 조처를 취했다. 원칙적으 로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다면 모든 이자 대부를 처벌하고 금지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자 대부라는 죄악을 뿌리 뽑는 데 있어 모든 사 회와 집단이 한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고위 성직자들은 명백한 이자 대 부업자만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던 반면 신학자들이나 도시를 돌며 설교를 하는 수도사들은 모든 이자 대부를 완전히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잉글랜 드와 프랑스의 왕실 그리고 신민들은 이탈리아 출신과 유대인 이자 대부업 자를 처벌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위의 결론에 비추어 볼 때 이자 대부를 금하는 교회의 윤리적인 경제관 념이 자본주의 형성에 장애물 역할을 했다는 르 고프의 지적은 부분적으 로 재고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교회와 세속 권력이 한 목소리로 이자 대 부의 근절을 주장할 정도로 강력하고 집중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 이다. 하지만 르 고프의 지적은 여전히 설득력을 가지며 유효하다. 우선 이 자 대부업자에 대한 종교적 제제와 법적 처벌이 완전히 사문화되지 않았고 게다가 자본주의 탄생에 선구적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 상인과 은행가들은 유대인과 함께 항상 처벌과 추방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롬바르 드 족속이라는 경멸적인 호칭으로 불리며 이자 대부업자로 간주되었던 이 탈리아 상인들은 유럽 전역에서 사회적 비난과 법적 처벌을 가장 많이 받 았다. 그렇기에 이탈리아 상인들이 이자 대부를 죄악시하는 교회의 가르침 과 사회적 제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분석해야만 이에 대한 최종적인 결 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이자대부, 고리대금, 자본주의, 유대인, 이탈리아 상인, 종교회의, 인노켄티 우스 3세, 자크 르 고프 <투고일자: 2015. 5. 8. 심사일자: 2015. 5. 9. 게재확정일자: 2015. 5. 15> 38 서양사연구 제52집 Abstract he Church’s Ban on Usury and the Rise of Capitalism Jongkuk Nam This article aims to review Jacques Le Goff ’s thesis that the church’s ban on usury deterred the growth of capitalism in the West. he analysis of decrees of the general councils in the 12-3th centuries reveals that the general councils were focused on punishing manifest usurers lending money at an exorbitant rate of interest, even recognizing the legitimacy of charging moderate interest in the realities of everyday life. On the other hand, many preachers and theologians condemned the taking of any interest, saying that prelates and princes were tolerating or even supporting usurers. Kings of England and France have not been held constant in enforcing the ban on usury, sometimes welcoming or expelling usurers. Ater considering these diferent attitudes toward usury, we can conclude that religious and social attack on usury was not so powerful in chorus to deter the growth of capitalism. (Ewha Woman’s University / namjk0513@ewha.ac.kr) Key words: usura, usury, capitalism, Jews, Italian Merchants, Innocent III, Jacques Le G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