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 (고려)
의종
毅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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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고려 국왕 | |
재위 | 1146년 4월 17일 ~ 1170년 10월 20일 (양력) |
전임 | 인종 |
후임 | 명종 |
고려국 왕태자 | |
재위 | 1133년 4월 1일[1] ~ 1146년 4월 17일 (양력) |
전임 | 왕태자 구 (인종) |
후임 | 효령태자 |
이름 | |
휘 | 왕현(王晛) |
묘호 | 의종(毅宗) |
시호 |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
능호 | 희릉(禧陵) |
신상정보 | |
출생일 | 1127년 5월 30일(양력) |
출생지 | 고려 개경 정궁 |
사망일 | 1173년 11월 14일(양력) | (46세)
사망지 | 고려 동경 곤원사 |
부친 | 인종 |
모친 | 공예왕후 임씨 |
형제자매 | 5남 4녀 중 장남 |
배우자 | 장경왕후 김씨, 장선왕후 최씨 |
자녀 | 1남 3녀 (4남 12녀)
효령태자, 경덕궁주, 안정궁주, 화순궁주 |
의종(毅宗, 1127년 5월 30일 (음력 4월 11일)[2], 율리우스력 5월 23일 ~ 1173년 11월 14일 (음력 10월 1일)[3], 율리우스력 11월 7일)은 고려의 제18대 국왕(재위 : 1146년 4월 17일 (음력 2월 28일), 율리우스력 4월 10일 ~ 1170년 10월 20일 (음력 9월 2일), 율리우스력 10월 13일)이다. 왕태자 책봉 교서에 따르면 의종은 용모가 빼어났다고 한다.[1]
휘는 현(晛), 자는 일승(日升), 묘호는 의종(毅宗), 시호는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능호는 희릉(禧陵)이다.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의 맏아들이다.
왕권을 강화하려고 애썼으나 끝내 정변으로 왕위에서 강제로 물러났고 마지막에는 이의방이 보낸 이의민에게 살해당했다.
생애
[편집]출생과 태자 시절
[편집]의종은 인종과 임원후의 딸 공예왕후 임씨의 다섯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땅에 떨어진 왕실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걱정했고 어머니는 그보다는 둘째 아들 대령후 경을 유난히 좋아해 그를 태자로 앉히려고 했지만 정습명의 강력한 지원으로 그러지는 못했다.[4] 1133년에 태자(太子)가 되었으며[5] 정습명을 사부로 삼아 수학했다.[6]
즉위 이후
[편집]불안한 출발과 친위군 강화
[편집]즉위한 뒤에 그는 아버지 때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으로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더욱이 재위 초반에는 몇몇 사람들이 다른 나라와 연계해 국가전복을 꾀하려다 사전에 들통나 처벌받는 등[7]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무신들을 등용해 친위군을 강화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이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경쟁자 제거
[편집]재위 중반에는 자신의 경쟁자이자 동생인 대령후를 유배라는 형식으로 숙청한다.[8]
편찬 사업
[편집]그의 재위기에는 《편년통록》, 《상정고금례》 등이 편찬되었다.[9]
다양한 정책 추진
[편집]1) 재위 초반에는 열병, 격구 등으로 잦은 군사 활동을 벌였다.[10]
2) '관악(觀樂)'이라는 형태로 음악 정책을 추진했는데[11] 이는 당악 요소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12]
3) 유불선을 아우르는 사상 정책을 추진했다.[13]
새로운 측근 세력 육성
[편집]주요 인물로는 김존중(金存中)[14], 영의(榮儀), 이복기(李復基)[15], 정함(鄭諴), 왕광취(王光就), 백자단(白子端) 등이 있다.
무신정변과 폐위
[편집]왕광취, 백자단 등 측근 세력의 폐단이 커지자 의종은 이들을 견제하고자 김돈중, 이공승 등 문벌 세력을 등용하고자 했으며, 이는 무신들이 의종을 향한 관심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김돈중의 유시(流矢) 사건으로 애먼 군인들이 처벌받자[16] 무신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의종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두 번이나 선택받지 못했다는 박탈심을 느꼈고, 지배 세력이 내시, 환관 등의 측근에서 문벌 귀족으로 바뀌더라도 자신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빠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이 위기의식이 결국 무신정변이라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17]
1170년 음력 8월 30일 보현원에 거동했을 때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일어남으로써 음력 9월 2일 무신들에게 폐위당해 3년간 거제도의 둔덕기성에 유폐되었다.[18]
김보당의 난과 최후
[편집]그 뒤 1173년에 김보당(金甫當) 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유배된 의종을 모시고 경주로 가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모두 진압되었다.[19]
1173년, 의종은 자신이 발탁했던 장수 이의민과 곤원사(坤元寺) 연못가에서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그가 의종을 끌어안고서는 등뼈를 꺾어버린다. 그리고 온 몸의 마디, 관절을 부러뜨려 버리고 의종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시체는 그대로 동경 (오늘날 경주)의 한 연못에 수장당하고 만다.[3]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이후 아우인 명종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는데 바로 희릉(禧陵)이다. 현재 희릉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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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편집]
왕후[편집]
후궁[편집]
왕자[편집]
왕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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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이 등장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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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편집]- ↑ 인종 11년 2월 17일, 율리우스력 3월 25일
- ↑ 《고려사》 권15, 〈세가〉15, 인종 5년(1127년) 4월 11일(경오)
- ↑ 가 나 《고려사》 권19, 〈세가〉19, 명종 3년(1173년) 10월 1일(경신)
- ↑ 《고려사》 권98, 〈열전〉11, 정습명
- ↑ 인종 11년, 《고려사》 권17, 〈세가〉17, 의종 총서에는 인종 21년인 1143년에 태자가 되었다고 나온다.
- ↑ 예: 《고려사》 권17, 〈세가〉17, 인종 24년(1146년) 1월 8일(무인).
- ↑ 《고려사》 권17, 〈세가〉17, 의종 원년(1147년) 11월 16일(병자); 의종 2년(1148년) 10월 13일(정묘)
- ↑ 《고려사》 권90, 〈열전〉3, 대령후 왕경(王暻); 권18, 〈세가〉18, 의종 11년(1157년) 2월 12일(무신)
- ↑ 이 책들의 편찬이 지니는 의미는 다음 논문을 참고할 것. 최봉준, 〈고려 의종대 다원적 사상지형과 『編年通錄』·『詳定古今禮』 편찬〉, 《한국사학사학보》 44, 한국사학사학회, 2021년.
- ↑ 이 군사활동들의 의미는 송인주, 〈의종 초기 정국의 동향과 군사 활동의 목적〉, 《역사교육논집》 42, 역사교육학회, 2009년, 259~82면을 참조.
- ↑ 《고려사》 권70, 〈악지〉1, 아악, 헌가의 음악을 독주하는 절도, 명종 18년(1188년) 2월 6일(임신), "况辛巳年 本朝儒臣狂瞽擅改, 而進退其次序, 錯亂其上下, 干戚籥翟, 致有盈縮不等之差?"; 권18, 〈세가〉18, 의종 15년(1161년) 11월 14일(임오), "御毬庭, 觀樂."
- ↑ 이강한, 〈충렬왕대의 시대상황과 음악정책〉, 《한국사학보》 55, 고려사학회, 2014년, 134~43면 참조.
- ↑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22년(1168년) 3월 26일(무자). 이 교서의 자세한 분석은 최봉준, 앞의 글, 215~18면 참조.
- ↑ 이규보, 《동국이상국집·전집》 권36, 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致仕庾公墓誌銘에 따르면 유자량은 그의 사위다.
- ↑ 〈김존중 묘지명〉 에 따르면 이복기는 김존중의 사위다.
- ↑ 《고려사》 권98, 〈열전〉11, 김부식 부 김돈중
- ↑ 이천우, 〈고려 의종 대 정국의 추이와 무신난의 배경〉, 《인문 사회 21》 24, 인문 사회 21, 2017년, 1031면.
- ↑ 《고려사》 권19, 〈세가〉19, 의종 24년(1170년) 9월 2일(기묘)
- ↑ 《고려사》 권128, 〈열전〉41, 이의민; 권19, 〈세가〉19, 명종 3년(1173년) 9월 13일(계묘)
- ↑ 모계 성씨를 사용
- ↑ 강릉공 왕감과 인종의 차녀 덕녕궁주의 딸
- ↑ 한남백 왕기와 예종의 장녀 승덕공주의 아들
- ↑ 한남백 왕기와 예종의 장녀 승덕공주의 아들
- ↑ 공화후 왕영과 인종의 장녀 승경궁주의 아들
같이 보기
[편집]제18대 고려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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