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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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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는 죽은 인물에게 국가에서 내려주거나 죽은 군주에게 다음 군주가 올리는 특별한 이름으로, 동양의 군주제 국가에서 시행되었다. 시호를 받는 대상은 황제, 제후, 임금 등의 군주와 그 조상 및 부인, 공신, 고급 관료, 기타 국가적으로 명망을 쌓은 저명한 인물이다.

시호는 국가가 부여하는 공적인 시(諡)로서, 개인이 붙이는 사시(私諡)와 구별되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諡)는 전자 쪽이다. 시호를 붙이는 제도의 기원은 중국 주나라 중기 때(기원전 9세기경)로 언급되며, 천자 뿐만 아니라, 제후・경대부・고관・저명한 유학자 등에게 내려졌고, 시대가 흘러 고승도 대상이 되었다.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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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중국 주나라 때 시호의 법도를 처음 정했다고 알려져 있다.[1]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의 군주들에게 시호를 올린 것이 최초로, 신라에서는 지증왕이 죽은 514년에 처음으로 시호를 올렸다고 한다.그 뒤로도 이어져 고려와 조선에서도 시행되었다.

조선왕조 시호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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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에서는 정2품 판서급 관직, 즉 오늘날의 장관급 관직을 지내야 시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예외적으로 종2품 대제학 역임자에게도 시호를 주었다. 정2품 관직을 지낸 모든 인물에게 시호가 내려졌던 것은 아니며, 생전에 정2품 관직을 지내지 못했더라도 공적과 절의가 출중한 인물이면 사후에 정2품 관직을 먼저 추증한 후에 시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 종친, 문관, 무관으로 정2품 이상 실직(實職, 실무가 있는 관직)을 지낸 인물에게 시호를 내린다.
  • 공신(功臣)으로 책봉된 인물은 관직이 낮더라도 시호를 내린다.[2]
  • 종2품으로 대제학을 역임한 자에게도 시호를 내린다.
  • 유현(儒賢)과 절의(節義)로 죽은 인물에게는 그 행적이 현저할 경우에 시호를 내린다.
  • 시호는 각 인물에 대해 자동적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 인물의 행적을 기술한 글(행장)을 조정에 제출하면 그것을 토대로 관계 관청에서 논의를 거쳐 시호 후보 3개를 정하고, 이후 국왕의 재가를 거쳐 시호를 내린다.[3]

시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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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를 정하는 방법은 시호법(諡號法)[4]에 따르는데, 각각의 글자마다 그 글자에 해당하는 뜻을 4글자 내외의 한자로 설정해 놓은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文(문) : 經天緯地 경천위지(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리다)
  • 忠(충) : 危身奉上 위신봉상(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든다)
  • 武(무) : 折衝禦侮 절충어모(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다)

약 300여 자의 글자에 이러한 뜻이 글자마다 1개 이상씩 설명되어 있으며, 국가에서 이 시호법에 따라 죽은 인물의 행적과 공업, 자취 등을 살펴 적절한 뜻의 글자를 결정한 후 시호를 붙인다. 이 글자들은 포폄에 따라 상시(上諡), 중시(中諡), 하시(下諡)로 나뉘며, 상시는 미시(美諡), 중시는 평시(平諡), 하시는 악시(惡諡)라고도 한다.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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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에게 준 시호는 통상 2글자로 정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1글자로 정했으나, 시호를 받는 인물이 늘어나 중복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글자 하나로는 어떤 인물의 행적을 잘 표현하기 어렵다고 여겨져 2글자로 확대되었다. 황족이나 고급 관료에게 열후와 같은 작위를 내리는 전통이 있는 중국에서는 작위에 따라 왕(王), 공(公), 후(侯) 등을 붙였으며, 작위가 없는 조선의 경우 모두 공(公)으로 통칭하였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충무공(忠武公) : 조선 이순신(李舜臣, 1545~1598)
  • 문순공(文純公) : 조선 이황(李滉, 1501~1570)
  • 충무후(忠武侯) : 중국 촉한 제갈량(諸葛亮, 181~234)

황제나 제후인 경우에는 글자자 수에 제한이 없다. 조선에서는 임금에게 대체로 8자의 시호를 올렸으며, 여기에 중국 황제가 내려진 2글자를 붙여 통칭하였다. 예전에는 중국에서 준 시호와 함께 썼으나 현재는 조선 자체의 시호만 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 : 조선 제9대 임금 성종 (成宗, 1457 ~ 1494)

앞의 '康靖(강정)' 2글자가 중국 조정에서 준 시호이고 뒤에 '仁文憲武欽聖恭孝(인문헌무흠성공효)' 8글자가 조선 조정에서 올린 시호이다. 이에 따라 성종을 '성종대왕' 또는 '공효대왕'이라고 한다. 성종은 묘호(廟號)이다.

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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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시호를 정하는 것이 원칙이나, 나라가 망하였거나 시대 상황이 맞지 않아 시호가 내려지지 않을 때는 저명한 학자나 문인, 친구 또는 개인, 단체 등이 자발적으로 시호를 붙여주는 경우도 있다. 이를 사시(私諡)라고 한다. 영친왕의 시호인 의민황태자, 이구 (1931년)의 시호인 회은황태손 등 문중에서 붙여준 시호와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의 시호인 염의선생(廉義先生) 등이 있다.

시호에 사용되는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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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에서부터 가나다 순으로 직렬함.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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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긴 시호를 받은 인물은 조선의 효명세자이다. 효명세자의 시호는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치중달화계력협기강수경목준혜연지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로 총 113자에 이른다.[12]
  • 가장 긴 시호를 받은 왕비도 조선의 신정왕후이다. 신정왕후의 시호는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신정왕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神貞王后)”로 총 56자이다.
  • 중국에서 가장 긴 시호를 받은 인물은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로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의 25자이다.
  • 시법에 정해진 글자 중에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글자(하시)도 있다. 시호는 고인의 삶을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못한 삶을 산 사람에게는 비판하는 의미로 부정적인 시호가 내려지기도 한다. 주나라여왕(려왕, 厲王), 후한영제(靈帝), 수나라양제(煬帝) 등이 받은 시호가 대표적이다.
  • 시법에서는 좋은 의미를 가진 글자(상시)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평이 좋지 못한 군주에게 주로 붙었던 시호도 있다. 또한 사망한 군주의 후계자와 관료들이 시호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군주의 업적과 관계 없이 높고 긴 시호를 올리는 경우도 많았다. 효명세자의 경우에도 후계자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시호가 추증된 바 있다. 반대로 선대 군주를 타도하고 즉위한 경우에는 뛰어난 군주라도 안좋은 시호를 받기도 한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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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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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비고(文獻備考) 제239권 東國見行諡法
  • 문헌비고 제 240∼241권 歷代名臣諡號
  • 사기정의 시법해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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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브리태니커백과사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 정공신만 가능하다. 원종공신은 해당하지 않는다.
  3. 행장을 지은 인물이 행장이 예조에 보고되기 전에 죄를 짓거나 하는 등의 물의를 일으키면 무효화하고, 다른 사람이 다시 행장을 지어야 했다.
  4. 시법(諡法)이라고도 부른다.
  5. 자하(子夏)가 효를 물으니, 공자께서 가로되, "부모의 안색을 좇아서 계승하는 것(承順父母顔色)은 어렵다. 일이 있으면, 아우나 아들이 그 일에 좇아서 힘쓰고, 술이나 밥이 있으면 윗 세대에게 차리는 것으로서, 효라고 하였던가?"(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 弟子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曽是以為孝乎?"), 논어 위정 2편
  6. 자유(子游)가 효를 물으니, 공자께서 가로되, “오늘의 효라는 것을 곧 봉양을 잘하는 것으로 일컬으니, 개와 말에 이르러도 모두 봉양이 있을 수 있으니, 존경하지 않으면 어떻게 구별하겠는가?”(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何以别乎?"), 논어 위정 3편
  7. "도총제 박실(朴實)이 졸하니, 조회를 2일 동안 폐하고 정효(靖孝)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너그럽고 즐거워서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하고, 큰 생각으로 절의(節義)를 행한 것을 효라고 한다.(都摠制朴實卒, 輟朝二日. 諡靖孝, 寬樂令終靖, 大慮行節孝.)"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3년 12월 1일 壬辰 1번째기사
  8. 그 부모에게 효도하고 덕을 간직하여 돌이키지 않았으나, 환난에 빠져서, 그 봉양을 마치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세상은 이를 불효라고 하는데, 군자가 이를 위로하려 가로되, "이 또한 효다."라고 하였다. 고로 예기(禮記)에서는 '전쟁터에서 용감하지 않음을 효도치 못하다고 하는데, 왜인가? 아마도 불의함으로써 부모를 욕되게 했음이라. 진의 주처(周處, 236~297)가 적-저족(氐族)의 제만년(齊萬年)이다.-과 싸우다 죽었는데, 노모가 계셨다. 하순(賀循, 250~319)이 그의 시호를 효라고 하였는데, 군자가 이를 옳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람은 반드시 먼저 효와 덕이 있어야 한다. 그 뒤에, 덕을 간직하고 돌이키지 않아야 효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단지 덕을 갖추고 돌이키지 않기만 하면, 이는 정(貞)이라고 할 것이지, 효는 아니다.(人有孝於其親, 而秉徳不回,以陷於患難, 不終其養者, 世以為不孝, 君子閔之曰, "是亦也." 故記以戰陣無勇為非孝, 何者? 恐以不義辱親也. 晉周處與賊戰而死, 有老母在, 賀循諡之曰. 君子韙之. 然而人必先有孝徳也. 而後'秉徳不回, 乃得為. 如徒曰"秉徳不回"者, 是為貞也, 非孝也.)
  9. 주역에서 이르기를, -산풍고(山風蠱), 육오(六五)-"아버지의 일을 이었다는 것은, 그로써 칭송 받으리라."라고 하였다. 상전(象傳)에서 이르기를, "아버지를 이음으로써, 칭송받음은 그 뜻이 선고(先考)를 이으려 하기 때문이다." 뜻으로서 가업을 받들 뿐이고, 그 일이 불가한 것이 있으면, 또한 따르지 않는다.(易曰 "幹父之蠱, 用譽." 象曰: "幹父用譽, 意承考也." 以意承之而已, 其事有不可者, 亦不從也.)
  10. 앞 주석을 해석하자면, 선대의 업에서 나쁜 것을 덜어내고 선한 것만 이어받기에 칭송받는다는 것이다.
  11. 유희(劉熙)가 말하기를, "스스로 괴며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부모를 섬기는 것이 효의 지극함이다."라고 말하였다. 劉熙曰, "以已所慈所惠之心, 推以事親, 孝之至也."
  12. 조선 문조#시호 항목에 시호를 받게 된 경위가 실려 있다.